이 책에 실린 ‘복음서’는 구전과 편집 과정을 모두 거친 사복음서를 한데 합친 것이다. 사복음서는 이야기꾼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들을 ‘공연한’ 것과 복음서 저자들이 그 공연을 영구적으로 ‘고정한’ 것의 결과물이다. 구전 문화는 암기에 능숙하고, 이들이 중요한 일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므로?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믿었다’?지금 복음서의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그 대상과 장소까지 똑같이 기록한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pp.21~22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땅’에 대한 약속은 궁극적으로는 성전이라는 구체적인 한 장소로 집약된다. 성전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방황하던 시절의 ‘이동 장막’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침내 솔로몬 통치 기간에 성전을 건축했고, 이후로 성전은 (대체로는) ‘성전-민족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로 성전을 채우시고, 이스라엘이 신실하게 살아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 임재를 약속하셨다. (주전 6세기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추방되었을’ 때 성전이 무너졌지만, 이스라엘이 귀환하면서 지도자들(에스라, 느헤미야)이 백성과 함께 성벽을 재건했고, 성전과 땅을 (부분적으로) 회복했다.
--- pp.30~31
복음서가 예수님과 갈등 관계였던 다양한 유대 집단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논쟁의 언어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정상 상태를 격론으로 묘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부 바리새인들이 까다롭게 율법을 준수하여 때로는 타인에게 짜증을 유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독자들이 모든 바리새인이 늘 그랬다거나 (더 심각하게는) 현대의 모든 유대인도 바리새인들처럼 까다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토라’를 엄격하게 준수한 것은 그것을 지키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회로 여겼기 때문임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철저한 준수의 중요성에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신 것이다.
--- p.37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거룩하기에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도 ‘거룩해야’ 한다. 따라서 레위기 19장 2절에서처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를 이전의 사고 흐름으로 이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언약으로 형성되는데, 그 언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하다’면, 이스라엘은 충성심과 신의와 신성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유지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하다’면, 그에 반응하는 이스라엘의 사랑도 ‘거룩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정죄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사랑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p.43
우리가 복음서의 증거에서 끌어낼 수 있는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편재한다고 가르치셨고, 그 나라(또는 더욱 영광스러운 궁극적인 나타남)가 곧 임한다고도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는 미완성인 채 이미 임했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하지만 또 다른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을 요약하는 동시에 폭넓게 정의하자면 이렇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인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되어 ‘샬롬’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상호 작용하는 사회이다. 이스라엘의 오래된 언약 이야기가 예수님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이다.
--- pp.51~52
타인에 대한 사랑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수 신경’으로 형성된 ‘하나님 나라’ 사회는 사랑이 모든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이다. 절망적인 빈곤이나 소외는 불의를 만들어 내면서 식탁과 방에서 목소리를 몰아낸다. 그 당시 예수님께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자비와 자선을 베풀어야 할 ‘대상’에 그치지 않았고, 한 사회에 ‘샬롬’이나 ‘정의’가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사회’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을 아시기에 ‘가난한’ 이들을 그분의 식탁에 초대하시고 그 나라의 권력 주체로 중심에 세우신다.
--- p.63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돋보이신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실제 상황에 대해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말씀하는 데 능통하시다. 복음서와 예수님, 기독교 전통에 익숙한 일부 현대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비유에 무뎌졌을 수도 있다. 플라톤이나 영안실에서 일하는 화학자 같은 문체를 지닌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고, 바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인 로마서는 철저히 신학적이고 (사실을 말하자면) 논리가 복잡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복음서에는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다. 예수님은 사색하고 명상하고 심사숙고하고 논쟁적이고 복잡하기보다는 활동가 스타일이셨다. 그분은 주야장천 방에 앉아 책만 읽다가, 갑자기 지성인 엘리트를 위한 학술 논문을 들고 나타나거나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책을 읽으시고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예수님은 셉포리스와 나사렛, 갈릴리해 주변 지역, 예루살렘에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셨던 것이다.
--- pp.75~76
지금까지 검토한 모든 특징 중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체 태도에서 매우 근본적인 요소를 놓치고 있다. 사랑과 긍휼이 그분의 열심을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열정적이셨고 반대 세력이 많았으며 위선을 비판하셨지만, 이분이 온갖 종류의 사람을 받아들인 사랑으로 유명하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유명했다. 저녁마다 연회가, 밤마다 심포지엄이 열리고, 집마다 식당으로 변했다. 그 식탁에는 온갖 종류의 소외된 사람이 모여들었다. 어부, 열심당원, 세리, 창녀, 나병 환자, 귀신 들린 자, 수많은 여인.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믿으셨기에, 그리고 ‘정결하든지’ 부정하든지, ‘율법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 도덕적으로 건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믿으셨기에 그리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아셨다.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