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 빈곤함을 인식한 심령의 상태’를 말하며, 이런 심령에게 천국의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영적 빈곤함을 깨닫는 것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피조성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이며, 자신 안에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음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영적 겸손’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심령은 이런 의미에서 천국의 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자신의 영적 빈곤함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며 복음과 구원을 성취하신 주께 다가와 구원의 손을 내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부에 자리 잡은 죄의 비참함과 심각성을 깨달아 영적 빈곤함으로 주리고 목말라 신음하는 영혼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은 영적 양식이요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가난한 심령에게 가까운 것이요, 가난한 마음으로 주를 붙든 자 안에만 천국은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는 자는 천국과 더욱 멀어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 제 안에 소망이 없고 아무 길도 찾을 수 없으며, 죄 중에 정죄와 심판으로 멸망할 나는 오직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은혜만이, 공로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사오니, 당신께 나의 빈손을 내밉니다. 힘없고 소망 없고 비참한 죄인을 건져 주소서”라고 부르짖으며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가는 자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람이 진정한 경건에 이르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경건(piety)을 목표로 하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이중 지식으로 가르칩니다. 즉 우리는 창조주로 그리고 구속주로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경건에 이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그분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죄의 자각은 구원의 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선행되며, 죄인이라는 가난한 심령 없이는 복음과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복음이신 주와 그분께 속한 구속의 성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을 피조물로, 더 나아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으로 깨달을 때 자신의 빈곤함을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만 복의 근원으로 겸손히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고 신을 알게 되면 오만해지며,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되면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하며, “예수를 알게 되면 그 중간을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만 자신의 비참함과 신을 모두 발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갈급)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빈곤을 스스로 자각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원본의 ‘프뉴마’는 심령은 물론 의지와 감정, 육체까지 전체가 하나인 전인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의 평지 설교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요”에서의 개념과는 다른 뜻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특수한 능력이나 재능을 의뢰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도덕성이나 선한 행실을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가 소유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상처와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지 않고 가난한(프트코이 : 아무것도 없는 가난, 페네스 : 풍족하지 않은 가난) 자가 복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61:1-3)을 인용하여 누가복음 4장 18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에서 ‘가난한 자’는 남왕국 유다가 겪는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에서 보는 이스라엘 상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로마서 1장 28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상태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 라오디게아교회의 경우 경제적인 부요 속에서도 마음의 눈이 어두워 자신의 본래적 상태를 보지 못함으로 실상은 가나한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소망의 빛도 없고, 앞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진리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우리의 태도이며 쉽게 표현하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서 두 사람(바리새인, 세리)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바리새인들은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아니하며 일주일에 2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자기들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다고 자랑하나,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다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세리는 자기를 비우고 통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였으나,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빌 3:5-8)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때 영적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0).
즉 영적으로 갈급한 자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며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사이(엔토스, 안)에 있느니라, the Kingdom of God is among(inside) you”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