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1세기 노예제가 특이할 정도로 복잡하고 각양각색이었음을 감안하여 노예 은유의 의미가 다양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렇지만 은유에서 어느 측면이 적절하고 어느 측면이 부적절한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저자가 인간-신 관계를 언급하면서 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노예제 개념에서 흔히 연상되는 통념 타래에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1세기 노예 용어와 결부되는 평민제도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1) 그 기간 전체의 문헌에서 노예와 노예제를 통상 어떻게 서술하는지, (2) 신약성경 자체와 (신약성경 개념 대다수의 모판인) 그리스어 구약성경(칠십인경)에서 노예라는 용어가 어떠한 어감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가능한 어감은 (1) 인간-하나님 관계를 주인의 배타적 소유권, 전적으로 주인만 섬길 가능성, 주인에 대한 완전한 의존 같은 개념으로 적절히 묘사한 것으로 (2) 한정 지으면 드러난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그 밖의 강제 순종, 자유 상실, 비굴한 복종 같은 개념이 부적당해 보이게 된다.
---「서문」중에서
신약 시대에서 ‘노예 됨’이라는 배경을 감안할 때 우리는 신체적 노예 됨을 은유적 노예 됨과 구분해야 한다. 일상적 의미인 신체적 노예 됨에는 두 사람의 외형상 관계가 수반되어서, 주인이 노예의 신체와 노예가 하는 일을 ‘소유한다.’ 이번 장과 다음 장(즉 2-3장)은 이러한 외적 형태에 관심을 둔다. 반면 비유적, 즉 정신적 노예 됨은 두 사람의 내면상 관계와 관련이 있어서, 그 상태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있거나(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노예’), 무언가의 지배 아래 있다(예를 들어 ‘의무의 노예’, ‘유행의 노예’). 이러한 내적 형태의 노예 됨이 이 책 나머지 부분(즉 4-9장)의 초점이다.
그러나 신약 노예제의 배경을 논의할 때 추가로 신중하게 구별 지어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개념상 배경과 역사상 배경 사이의 구분이다. 교회에 이방인의 큰 무리가 급속도로 포함되기는 했지만 기독교는 유대교의 비밀 집회로 시작되었고, 첫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의 노예제든 비유상의 노예제이든, 노예제에 대한 신약의 관점에 유대교가 나타나고 더 전반적으로는 고대 근동의 개념이 나타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의 개념도 틀림없이 한몫을 한다. 신약 전체가 그리스어로 쓰였고 그리스어가 헬레니즘 시대의 공용어였으므로 신약에서 노예제를 나타내는 용어에는 그리스식 분위기가 묵직하게 따라온다.
---「2장」중에서
노예 착취를 반대하고 노예 매매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고대에 드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세기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신약은 그리스도인 주인들과 동시에 노예들에게도 내린 명령 때문에 독특해 보이며, 신약에서는 주장할 권리보다는 실행해야 할 의무에 강조점이 있다. 첫째, 노예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경륜에서 노예들은 주인들과 동등한 신분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이들의 개인 존엄성이 확립된다. 의미심장하게도, 기독교 이전의 사회 규범에서는 노예들이 편지 수신인에 들어가지 않았다. 노예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나 자유인들의 사회적 책임이 노예들에게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노예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했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흔히 하우스타펠른(Haustafeln, 가정 규범)이라고 알려진 가정 의무 목록을 보면 노예들은 사도의 명령을 주인과 동등하게 받았다. 노예들은 도덕적 결정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3장에서
스토아 철학의 사유에 따르면 사실상 영적으로 자유로운 현자에게 외부 환경은 전혀 상관없다. 이를테면, 어느 사람에게 노예의 표식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유롭지 않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몸이 사슬에 매여 있을 때조차도 영혼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토아 철학에는 “노예이지만 자유로운”(둘로스 엘류테로스)이라는 역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유에서는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그리스도인은 너나없이 영적으로 자유롭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노예, 즉 ‘자유롭지만, 노예’다. ‘노예 됨 안에 있는 자유’는 기독교의 불안하지만 절묘한 역설로, 기독교의 또 다른 전형적 역설인 ‘약한 중에 강함’(참고. 고후 12:10)에 필적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이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인정하는 ‘약함’ 속에서 가장 완벽해지듯이 그리스도인의 자유 역시 오로지 그리스도와 그분 백성에게 전심으로 헌신할 때 완전해진다. 그래도 이 두 역설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당연한 결과이므로 단순히 유사한 역설은 아니다.
---「4장」중에서
이렇게 노예 됨과 소유권을 고찰할 때 무엇이 요점으로 부각되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만드셨고 이제는 존재하게 하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으니”(고전 8:6) 모든 사람이 그분의 소유라는 의미다. 그런데 어떠한 의미에서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 바로 그분의 소유인 백성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모든 불법에서 자유롭게 하시면서(딛 2:14) 그분의 노예로 사셨기(고전 6:19-20; 7:22-23)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완전히,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분의 노예들이 자원하여 받아들이는 포괄적 소유권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주인이시다. 구매에 대한 그분의 권리는 무한하고, 어느 노예도 서로 다른 두 주인을 적당히 섬길 수는 없으므로 그분은 주권을 놓고서는 경쟁자를 전혀 용납하지 않으신다. ‘구매 증명’ 즉 소유권 표시는 신자의 삶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이다. 바로 그 성령은 하나님의 이 ‘자산’이 목적지에 온전히 도착하리라는 보증이다.
---「6장」중에서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영광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신약 저자 네 명의 편지 서두만 보아도 뚜렷하게 보인다. 바울이 로마서를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인[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 1:1)로 시작하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자(참조. 고전 1:1) 그의 노예”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심장하다. 베드로도 예상과 달리 베드로후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벧후 1:1)로 시작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자 노예”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들 초대 교회의 주요 인물 둘 다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더 귀한 특권으로 생각했다고 추론해도 되지 않을까? 다음으로 예수의 두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의 증언도 있다.
---「7장」중에서
신약이 그리스도의 노예를 비유적으로 기술하면서 노예 됨에 항상 따라다니는 부정적인 특징을 제거한 결과 그 비유는 주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배타적 헌신을 묘사하는 완전히 긍정적 이미지가 되었다. 둘로스라는 용어를 기독교 신자들이 사용하면서 둘로스는 듣기 좋은 구석도 있고 불쾌한 구석도 있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듣기 좋은 말이 되었다. 신약이 노예 이미지를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사용한다는 것은 놀라워할 일이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죄에, 멸망에, 정욕에, 술에, 영적 권세에, 거짓 신들에게, 타인에게 노예가 된 사람들에 대해 읽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게, 그리스도에게, 의에, 순종에, 동료 신자들에게 노예가 되어 있거나 노예가 되라는 권함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노예의 사회적 현실은 너무나도 다면적이고 모호했기에 의식적으로 숙고해야 이 용어를 서로 다른 비유의 의미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Martin, Slavery as Salvation [1990], 60, 참조. xviii). 긍정적으로 쓰였든 부정적으로 쓰였든, 노예 이미지는 응용 범위가 다양하다.
---「8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