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률 1위, 빈곤율 하위 20퍼센트, 빠져나간 기업과 자본……
인구 14만 명의 작은 도시 프레스턴은 어떻게 영국 최고의 도시가 되었나?
제조업이 쇠퇴하고 지역 경제를 떠받들던 기업이 무너지고 정부는 예산 삭감으로 일관한다. 빈곤율과 실업률이 치솟고 청년층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프레스턴에서, 영국 전역의 지방 도시에서, 세계 곳곳에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현실이다. 지역 경제는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며, ‘지역 소멸’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영국 북부에 위치한 프레스턴의 상황 역시 심각했다. 지역 경제를 떠받들던 제조업이 무너졌고 7억 파운드(약 1조 1165억 원)를 들여 유치한 쇼핑센터 건립은 2008년 금융 위기로 무산되었다. 중앙 정부의 보조금 삭감으로 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를 외주로 돌렸다. 그렇게 프레스턴의 지역 경제는 장기간 침체했고 빈곤율이 영국 하위 20퍼센트로 추락했다. 또한 부유한 지역의 평균 수명이 82세인 반면 빈곤한 지역은 66세에 그치는 등 양극화가 극심했고, 자살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에 꼽히기도 했다.
이런 프레스턴에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의 공저자 매튜 브라운이다. 2002년부터 그는 ‘공동체 자산 구축’ 전략을 바탕으로 프레스턴에 위치한 공적 기관들의 지출 및 지역에서 발생한 소득이 지역 내에 돌도록 했다. 이에 더해 생활임금 지급, 노동자가 기업을 소유하는 협동조합 설립 독려, 외주 및 민영화된 사업과 서비스를 내부 조달로 돌리는 정책 등을 통해 지역 경제를 되살렸다. 그렇게 프레스턴은 영국의 싱크탱크 데모스에서 고용, 노동자 임금, 주택 가격, 교통, 환경, 일과 삶의 균형, 불평등 등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 영국에서 가장 개선된 도시(most improved city)에 선정되었다. 가히 도시의 ‘화려한 부활’이라 할 만하다.
지역에서 돈이 돌게 하라!
―공동체 자산 구축의 힘
기적 같은 변화를 만들어 낸 프레스턴 모델의 핵심은 공동체 자산 구축(Community wealth-building) 전략이다. 국내에서 ‘공동체(지역 사회) 부 만들기’, ‘지역자산화’ 등 다양한 용어로 번역된 이 개념은 미국 클리블랜드의 싱크탱크 ‘협력하는 민주주의’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지역에 기반을 둔 공적 기관, 이른바 앵커 기관의 지출을 지역 내로 돌리는 것이 요점이다. 지역 안에서 부(자산)이 순환하게 하는 것이다.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대형 병원인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의료 세탁물 관리를 종전의 다국적 기업에서 지역 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여, 이 협동조합의 직원이 세 배 증가하고 이들의 급여가 15퍼센트가량 오른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레스턴 시의회 관계자들은 이 전략을 받아들여 앵커 기관 여섯 곳의 조달 정책을 바꾸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이 기관들이 프레스턴에서 지출한 금액은 2013년 약 3800만 파운드에서 2017년에는 1억 1100만 파운드로 치솟았다. 프레스턴 또는 영국 밖의 다국적 기업이 독점하던 상품과 서비스 계약을 지역 업체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 안에서 돈이 돌기 시작했다. 프레스턴에 소재한 사업체가 따낸 계약은 학교 급식, 연료, 법률 서비스에서 대규모 건설 공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이에 더해 매튜 브라운과 시의회 각료들은 지역 내 사업체가 시의회와 앵커 기관의 계약을 수주할 때 지역 내 노동자 채용 및 생활임금 지급 등 윤리적 책임을 다하도록 독려했다. 그렇게 역외로 유출되던 상당액의 지출이 지역 내에서 순환하게 되었고, 프레스턴과 인근 지역 저임금 노동자 약 25퍼센트가 임금 인상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지역의 실업률과 근로빈곤층이 감소하고 빈곤율이 개선된 것은 물론이다.
민주적 경제를 향한 발걸음
―협동조합과 공동체 은행
프레스턴 모델을 만들어 내는데 영감을 준 또 하나의 사례로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있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서 지역 민주주의와 협동조합과 공동 소유권을 바탕으로 성장한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현재 스페인 내 여섯 번째 규모의 대기업으로 총매출액 60억 원에 달한다. 프레스턴에서는 앵커 기관의 지역 내 조달을 시행하던 중 마땅한 기업이 없는 경우 협동조합을 통해 그 공백을 메우는 방법을 택했다.
이와 더불어 현지 기업이 매도를 추진하면 협동조합이 이를 인수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프레스턴에 자리한 센트럴랭커셔대학과 협업하여 학생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교육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프레스턴은 노동자가 직접 기업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민주적 경제’ 목표도 달성했다. 프레스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신용조합을 지원하고 공동체 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에 기반을 둔 금융 기관은 약탈적 금융 자본에 노출된 금융 소외 계층을 구제하고, 투자금이 지역 공동체로 흘러 들어가게 하여 지역 경제를 더욱 탄탄하게 하며, 금융 불평등과 사회 불평등 감소에 기여할 것이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의 시대
해법을 찾는 이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안내서
프레스턴 모델의 분명한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 전략이 이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스턴, 더 나은 경제를 상상하다』에는 프레스턴에서 일어난 변화의 과정이 상세히 담겨 있다. 프레스턴에 영감을 준 클리블랜드 모델과 몬드라곤 모델에 대한 정보는 물론 웨일스의 ‘기초 경제’ 전략, 런던 뉴엄자치구와 해링게이자치구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 일어난 시민 운동, 스코틀랜드 노스에어셔의 사례, 주민 참여 예산 제도 등 현재 영국 전역에서 시행 중인 실제로 실행된 정책에 관한 정보가 가득하다. 여기에 ‘지역 순환 경제’ 연구를 오래도록 이어 온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양준호 교수의 해제 글을 더했고, 정치에 직접 뛰어들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송정복 희망제작소 자치분권팀장의 부록 글을 수록했다. 이 모든 내용은 지역 소멸 시대에 지역 사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프레스턴 모델을 설계한 이들은 프레스턴에서 일어난 일이 모든 지역에서 실행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레스턴의 사례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한다. 다만 지난 4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제조업이 쇠퇴하고 정부의 긴축 정책과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쇠락해 온 지방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 가운데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본 여러 사례를 소개하며 이 전략들을 각 지역에 맞추어 변화시켜 적용할 것을 권한다.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고 대기업이 철수하며 지역 경제가 휘청이는 사례가 많은 우리나라에 공동체 자산 구축과 지역시민주의에 바탕을 둔 프레스턴 모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튜 브라운은 “변화를 향한 열망”을 프레스턴 모델의 동력이라고 이야기하며 “중요한 건 지역의 돈이 아닌,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이고, 시민의식이며, 장소에 대한 자존감”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도 대기업 유치 만능론에서 벗어나 지역 기업이 주도하고 지역 주민이 동참하는 새로운 모델을 세울 때가 되었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책 속의 다양한 사례들은 지역 소멸에 위기감과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