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오래 일기를 썼고, 오래 쓰다 보니 이런 일도 있었고, 오래 쓰다 보니 이런 점도 좋더라, 자랑하면서 당신도 써 보라고 유혹하는 책. 내 자랑이 누군가의 마음 줄을 건드려 그도 나 같은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오래도록 일기를 쓰게 된다면 나로서는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
--- p.10
진실의 쾌감이 중독을 불러오고, 그것이 결국 습관이 된 과정, 그것이 없었다면 내 일기장은 어느 옛날에 일련번호가 멈춘 채, 해마다 1월 1일부터 몇 장 쓰다가 그만두는 흔해 빠진 일기로 그쳤으리라. 그런데 그 중독과 습관의 힘으로 계속 끊어지지 않은 채(흐름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 날마다 쓴 건 아니지만) 일기를 써 오다 보니, 중독은 더욱 깊어지고, 습관은 더욱 몸에 붙었다. 습관은 다른 무엇보다 힘이 세다.
--- pp.28~29
일기가 아니면 요즘은 만년필 쓸 일도 거의 없다. 예전엔 편지 쓸 때라도 만년필을 썼지만 요즘은 편지 쓰는 일도 없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좋아하는 만년필로 사각거리며 일기를 쓰는 시간은 내게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일기를 잘 쓰기 위해서 만년필로 쓰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만년필을 쓰고 싶어서 일기를 계속 쓰는지도 모르겠다.
--- p.65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기분을 문득 느끼게 되어 일기장 첫 장에 ‘나를 둘러싼 이 아늑하고도 무한한 힘……’이라는 말을 적었고, 그 뒤로는 일기장이 바뀔 때마다 첫 장에 이 말을 계속 써 넣고 있다. 새로이 이 말을 적을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음미해 본다. 그러면 아무리 힘들고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다시금 조용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내게는 주문 같은 말이다. 다시 외워 본다. 나를 둘러싼 이 아늑하고도 무한한 힘…….
--- p.68
세상에서 ‘주인공’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심지어는 ‘실패자’로 불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기라는 대하소설 속에서 나는 언제나 ‘주인공’이다. 세상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아니,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낮춰 보든 내가 쓰는 일기의 주인공은 무조건 ‘나’일 수밖에 없다.
--- p.75
어쨌든 이 일기를 읽으면 나는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날 그랬지, 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처럼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물론 다른 사람은 이 글을 읽어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기를 종이에 적힌 ‘글’로만 읽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자리로, 과거의 내가 되어 이동을 한다. 그것은 현재의 내가 회상하고, 추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것은 그대로 다시 살아 보는 경험이다. 나는 다시 소녀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사랑도 하고, 고통도 겪어 보며 그 삶을 몇 번이고 다시 산다. 과거를 고쳐 내지는 못해도, 몇 번이고 다시 과거를 경험할 수 있는 기쁨, 몇 번이고 되살아 보는 경이로움!
--- p.83
태어나면서 받았던 뒤죽박죽인 퍼즐 한 상자를 받은 그대로 들고 떠난들 어떠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무심한 듯 멋져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이루는 그림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는 인생이 더 마음에 든다. 엉망진창 엎어 놓은 퍼즐들을 그대로 다시 들고 떠나는 삶보다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맞춰 보고 ‘아, 내 인생은 이런 그림이었구나!’ 하고 알고 가는 삶을 더 좋아한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니 호기심이 조금이라도 채워지는 쪽을 더 만족스러워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기 쓰기의 좋은 점이 하나 더 생긴다고 볼 수 있겠다.
--- pp.105~106
일기를 쓴다는 것,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 자신과 오롯이 만나는 일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살아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일을 일기 쓰기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기를 쓸 때면 나 자신과 오롯이 만나기가 다른 일을 할 때보다 쉽다. 껍데기로 휩쓸려 지내다가 중심을 자기에게 놓고 무엇이라도 끼적거리는 그 순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힘으로 인생을 버텨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하루 한 시간이라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남은 스물세 시간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있는 존재이니까.
--- pp.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