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를 교회의 중심으로 만들어준 예수의 말, “너는 베드로(반석)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이니...”에 숨겨진 비밀이 ‘베드로의 교서’라 불리는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 교서는 역사 속을 흐르며 많은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국가에게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샹하이의 한 전당포에서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파멸로 이끌면서 그 힘을 과시한 ‘교서’는 웹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세계의 운명까지도 조정한다.

2032년, 제로 콘택트라는 대감호 계획으로 라르브(애벌레)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대재앙’을 피해 캡슐 속에 수용되어 살아간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금지되어 사람들은 오직 웹 상에서만, 동영상과 음성 인식 장치 그리고 상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아바타(분신)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고립된 캡슐 속에서 동일한 방식에 의한 살인 사건 여섯 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밀튼 프리드맨 서바이벌 유니트의 보안 책임자 하타웨이 형사는 과거의 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들이 데이터 조작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친근한 모습을 취하고 침입한 아바타에 의해 저질러졌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해킹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캡슐에서 태어난 소년 칼뱅은 염세주의자인 미치광이 학자 니치, 자신이 중국의 지도자 왕 뤄쉰의 동지라고 주장하는 중국학의 대가 렘브란트, 컴퓨터의 마술사라고 불리며 칼뱅의 능력을 키워주고 그를 돌봐온 아다, 2D 변환기와 음성 인식 장치만으로 그들과 접촉하는 전직 중국인 외교관 첸, 칼뱅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제로 콘택트 지대의 감호소 간수 토마 들로 이루어진 웹 상의 모임 ‘소비에트’에 참여하면서 고립된 캡슐 생활의 외로움을 달랜다. 그들이 모임을 갖던 어느 날,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 원더월드가 자랑스럽게 내세운 프로그램을 도난당했고, 절도범들에 의해 웹에서 무료로 유포되고 있다는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그리고 그날 뒤늦게 모임에 참석한 토마는 아다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비록 모임에서 가장 어리지만 동등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칼뱅은 이 사건을 계기로 회원들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따돌림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료들을 불신하게 된 칼뱅은 아다가 절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칼뱅은 직업적 파트너이자 연인인 모가 방문하자 그를 통하여 위로를 받으려 하는데, 갑작스레 공격적으로 변한 모의 아바타가 그를 공격한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아바타가 멈추어버린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칼뱅은 더 이상 동료의 모습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아바타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칼뱅은 진정한 동료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의 접속 지점을 추적하고, 동료들이 말하던 것과는 달리 토마는 재무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휴머니스트인 첸은 중국에서 가장 보안이 잘되어 있다고 알려진 군사 시설에서, 니치는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잘 숨겨진 곳에서 접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렘브란트의 접속 지점만이 기왕에 알고 있던 것과 일치하자 칼뱅은 그를 마음의 안식처로 삼는다.

칼뱅은 아다의 죽음, 원더월드 도난 사건, 그리고 여섯 건의 살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조금씩 밝혀내면서 동료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그 사건들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웹잡에 접근할 수 없어 캡슐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한 렘브란트를 위로해주려던 칼뱅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자신은 아다를 사랑하며 함께 사랑을 나누기까지 했다고 고백하고, 아다와 칼뱅의 진정한 관계를 알고 있던 렘브란트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경악하는데...

칼뱅과 아다 사이의 관계, 연인이었던 모를 비롯하여 칼뱅의 동료들이 숨기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역시 의문에 싸여 전해지던 ‘베드로의 교서’에 감추어진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고, 인류에 대한 신의 계획이 폭로된다.

<b>완벽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에 둔 가상 현실의 실현</b> <br/><br/>캡슐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마치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만나듯이 상대를 마주할 수 있다. ‘3D 변환에 의한 상호 작용 시뮬레이터’라고 불리는 기구를 사용해 대화 상대자에게 받은 데이터를 3차원으로 물체화시키는 도구로 글쓴이는 ‘아바타’를 제안한다. 이 아바타는 현재 인터넷 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아바타에서 한층 발전하여 실제 인간의 모습 그대로, 움직임과 표정, 혈색 등까지도 전송하여 3차원에서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br/><br/>탄소 섬유로 만든 ‘아바타'의 뼈대는 신축성이 있는 기관들로 이루어져 미세한 모터들에 의해 그들의 몸집과 키가 조절된다. 수축성 있는 합성 섬유로 이루어진 근육 조직은 형체와 질량감 그리고 운동 기능을 부여한다. 또한 피부는 어드레스를 쉽게 검색할 수 있는 피코-색소로 채색된 탄력성 물질로 재단되어 전기 화학적인 명령의 수용 여부에 따라 그것의 미세한 여포濾胞들이 열리거나 닫히면서 그 속에 포함된 색소들을 드러내거나 감춘다. 게다가 방향과 페로몬을 방출하게 하는 피코-캡슐들이 들어 있다. <br/><br/>레이저 스캐너가 대상의 몸을 지속적으로 ‘복사’하면 지능이 있는 해석 단계에 의해 일차 데이터들이 의미를 가진 묘사로 변형되고, 그것이 웹을 통해서 수신 장치로 전달된다. 여기서 그 묘사는 기본적인 명령어로 번역되고 그 명령어에 따라 이 하이테크 인형은 자신의 매개 변수들을 조정해서 모델의 형체와 움직임, 형상, 그리고 정확한 표정들을 재현한다. 이러한 장치는 모델들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델의 의향을 해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을 조절하여 쓰다듬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과 때리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트뤼옹은 이렇게 인류가 끊임없이 꿈꿔오던 가상 현실, 아직도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인 가상 현실을 탄탄한 과학적 기반 위에서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br/><br/><b>냉혹한 전체주의－깨닫지 못하는 인류와 반문명의 기치를 든 전사들</b><br/><br/>또한 트뤼옹은 미래의 모습을 통하여 현 인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제로 콘택트 협약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대재앙’이라고 불리는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부의 재분배에 곤혹스러워 하던 소수 특권 계층 ‘앵뷔’들이 이를 빌미로 삼아 인간의 신체적인 접촉을 금지하고 격리하도록 만들어낸 법안이다. 인류를 보호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에도 불구하고 제로 콘택트 협약은 가진 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자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br/><br/>또한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다. 이 협약은 라르브 사이의 결속을 약화시켜 저항 정신을 잃게 함으로써 앵뷔들의 선전과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며, 로켓이 발진하며 연료를 다 연소한 부분을 한 단 한 단 분리하듯 ‘글로벌 다운사이징’, 즉 잉여 인구의 제거를 통해 앵뷔들에게 더욱 적절한 삶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라르브들을 캡슐의 위험을 알리는 칼뱅의 메시지에도 비웃음과 무관심으로 반응할 뿐이고 스스로 껍질을 깨고 세상을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게토처럼 시작해서 가스실로 끝날 거예요”라던 아다의 주장을 받아들인 노플러그들만이 미래에 대비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될 라르브를 기다린다. 노플러그들은 명분뿐인 감호監護 생활에 반기를 들고 캡슐에 수용되는 것을 거부하여 스스로의 삶을 찾기 위해 떠났거나 이미 캡슐 속에 수용되었으나 참된 삶에 눈을 뜨고 탈출한 사람들로 자연 속에서 고달프지만 자신의 의지로 삶을 영위한다. 또한 중국으로 대표되는 협약 반대국과 미국, 유럽, 일본을 아우르는 협약국 사이의 대립은 현재 제3세계와 강대국의 대립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해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준비되지 않은 개방을 강요하고, 강대국 식의 발전 개념을 도입해 풍요로웠던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혼란과 분열을 유도해 강압에 대한 저항을 미리 막아버리는 전체주의이자 이기적 민족주의에 대해 글쓴이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br/><br/><b>웹의 미래, 희망인가</b><br/><br/>인류에게 많은 편의를 주고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인터넷에 대해서도 글쓴이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br/><br/>웹을 통하여 정보를 얻고, 일을 구하고, 사람을 만나고, 모든 생활을 해결하던 캡슐의 아이 칼뱅이 “네트워크는, 그러니까 웹은 곧 삶이군요” 라고 파악했을 때 캡슐 이전의 삶을 경험했던 렘브란트는 “아, 웹은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분리시키고 있어. 그것은 서로를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체시키고 있어. 그것은 결합시키지 못해, 고립시킬 뿐이야. ‘웹이란 삶의 반대어’야”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견해에 반해 글쓴이는 또한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살아난 칼뱅이 캡슐의 위험과 곧 인류에게 다가올 죽음의 손길을 감지한 곳 역시 웹이며, 그 해결책과 탈출의 방안을 찾아낸 곳도 웹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은 인류에게 제시된 또 하나의 길이다. <br/><br/><b>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사상의 위험</b><br/><br/>글쓴이는 가장 확고한 종교적 신념 속에 의혹을 불어넣음으로써 이 소설을 가장 훌륭한 철학적 에세이이자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가상 세계에 대한 보고서로 만든다. <br/><br/>‘베드로의 교서’에는 유일신 여호와가 선택한 것은 인류가 아니며 인류는 그저 신의 숨결에서 탄생한 ‘크레아튀르’가 영원한 거점을 찾아다니는 여행 중에 잠시 쉬어가는 숙소일 뿐이라는 예수의 고백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원제가 가지는 의미가 드러나는데, 불어의 pierre는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이르는 것이자, 결국 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돌-반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br/><br/>“‘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그런데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은 스스로 육체가 되어 우리들 가운데로 이주해서 살았느니라.’ 하지만 인간은 영원한 말씀의 주인이 아니고,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이 거처로 선택한 성전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서 단지 일시적인 거처, 여정 중에 묵는 임시 숙소, 결정적인 거처를 찾아 떠나는 길에 잠시 머무는 항구일 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찾고 있는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집이기 때문이다.”<br/><br/>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같은 앵뷔들의 행동들이 사실은 크레아튀르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으며, 유일신에 대한 맹신, 오직 ‘크레아튀르’에게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니치는 이러한 앵뷔의 계책에 의해 인류가 사라져가는 것을 방관하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또한 크레아튀르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아다를 오해하여 그녀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고발한다. 그러나 실제로 신의 의지는 투쟁과 반발 속에서 인간이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었으며, 아다가 계획했듯이 서로 협조하고 도우며 결국엔 동화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트뤼옹은 인류를 구원할 지도자이자 구세주는 신 혼자만이 아니라 인간이 신과 상호성을 가지며 협력할 때 인간 속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br/><br/>미래 사회의 공학 기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꼼꼼히 따지면서 사이버네틱한 존재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소설을 주로 쓴 장 미셸 트뤼옹은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세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시해준다. ?1984년?이나 ?장미의 이름?을 뛰어넘는 독특한 형식으로 집필된 이 ?2032년?은 미스터리 SF 소설이자 미래를 배경으로 한 환타지이며, 형이상학적 고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철학 에세이이고, 완전히 격리되어 실제적인 접촉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완벽하게 해부해놓은 심리 소설로, 무거운 주제를 버거워하는 독자들이나 요즘 만연하고 있는 가벼운 글들에 식상한 독자들을 함께 아우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