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임금이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려 산길이 얼어붙고 임금이 타고 가던 말이 미끄러져 엎어진 것이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으나 수없이 자빠지고 엎어졌다. 결국 다시 성 안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훈련도감 대장 신경진이 서울에서 내려오자 성내의 수비를 정비했다. 신경진을 동쪽 망월대를 수비케 하고, 이현달을 중군으로 삼고, 호위대장 구굉은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 수원 부사 구인후는 그가 거느리고 온 군사에 본부의 군사를 더해 구굉을 돕게 하였다. 상중에 있는 이곽을 불러 중군으로 삼고, 총융청 대장 이서는 북쪽을 지키게 하고, 수어사 이시백은 서쪽을 지키게 하였으며, 이직을 중군으로 삼았다.
전날, 산성을 영남 군사로 나누어 지키게 하였는데 길이 멀어 미처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찰사 김류가 경기도 수령들로 하여금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여주 목사 한필원, 이천 부사 조명욱, 양근(지금의 양평군) 군수 한회일, 지평 현감 박환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겨우 성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태반의 많은 군사들은 미처 들어오지 못했다. 성 안에 들어온 군사가 서울 병력과 지방 병력을 합해 겨우 1만 2천 명이었고, 문무 관리가 2백여 명, 그 밖의 노복과 사람들이 2백여 명이었다. 이때 최명길과 이경직이 홍재원에서 돌아와 고했다.
“마부대가 강화를 하기 위해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와 있는데, 바람이 불고 날씨가 몹시 추워 인가에 들어가 있으라 했으나 아직 화의가 맺어지기 전이니 눈바람을 맞을지언정 인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과 얼굴빛으로 보아 절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정은 모두 최명길의 말을 믿었지만 임금은 이번에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경은 필시 속은 것이다. 어찌 세 가지 조건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pp.45~46 실패한 강화도행,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조선의 제3차 상서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엎드려 절하고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밝으신 뜻을 받자오니 간곡하신 타이름을 내리셨습니다. 그 책망하심이 엄하신 것은 곧 가르치심이 지극하심입니다. 가을 서릿발 같이 매운 가운데 봄날이 소생하는 뜻이 들어 있어, 엎드려 읽고 황감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멀리 미쳐서 모든 번방이 입을 모아 하늘과 사람이 귀의하여, 크신 명령이 바야흐로 새로운데, 소방은 10년 형제의 나라로서 도리어 흥운의 시초에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반성하여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지금의 소원은 다만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의 습관을 깨끗이 씻고, 온 나라를 들어 다른 모든 번방과 같이 명을 고자 할 뿐입니다. 진실로 뜻을 굽히시어 위급을 안전하게 하심을 입어 스스로 새로워짐을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절차에 응당 행할 의식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행하겠습니다.
오늘에 있어 출성(出城)하라는 명령은 실로 인복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그러나 아직 겹겹이 둘러싼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의 노여움이 대단하시어, 여기 있어도 죽고, 성을 나가도 역시 죽을 것이므로 용기를 멀거니 바라보고 자결하고 싶을 뿐이니 정상이 부끄럽습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성 위에서 천자를 뵈는 자는 예를 그만둘 수 없고 병위 역시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방의 소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으니, 이는 아뢸 말씀을 다 아뢴 것입니다. 이는 깨달아 경계함이요, 마음을 기울여 귀순함입니다.
황제께서는 바야흐로 천지의 모든 생물까지도 마음에 두시는데, 소방이 어찌 온전하게 살아 후하신 보양 가운데 듦이 부당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실 것이라 감히 진정을 토로합니다. 삼가 은혜로운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은 이조 판서 최명길이 쓴 것이다.---pp.134~135 김상헌, 국서를 찢고 통곡하다
오달제, 윤집은 척화파가 되어 적진에 가게 되었는데도 기색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의연했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이날 저녁에 윤집과 오달제는 하직 인사를 하러 임금을 뵈었다.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도를 살펴보면 본래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윤집이 아뢰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이어 오달제가 말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임금이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는 어디에 있는가?”
윤집이 먼저 대답했다.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부사(府使)가 적을 만나 몰락하였다고 하니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이어 오달제가 대답했다. ---pp.190~191 임금의 항복절차를 논의하다
햇빛이 나지 않아 날씨가 암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이 빨리 나오기를 재촉했다. 임금이 푸른 옷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으며, 그 뒤를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또한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목 놓아 슬피 울었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기병 수백 명 달려 왔다. 임금이 물었다.
“저들은 뭐 하는 자들인가?”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소위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가 임금을 위로하자 임금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용골대는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은 단지 삼정승 및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 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 익위사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청의 황제가 황금빛 천막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들이 좌우에 옹립해 있었다.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른 뒤 평지의 차가운 진흙 위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임금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한 뒤 용골대가 황제에게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청 황제의 말을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리고 임금은 용골대의 뒤를 따라 단 아래로 갔다. 임금은 북쪽을 향해 마련한 자리 위에 앉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 뒤에 용골대는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혔다. 강화도에서 잡혀온 두 대군과 신하들이 단 아래 서쪽에 죽 늘어섰다. 용골대가 청 황제의 말을 받아 임금에게 단에 오르라 명령했다. 청의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임금은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그 옆으로 청나라 왕 3명이 차례로 나란히 앉았다.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 4명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달아 앉았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화도에서 잡혀 온 신하들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 잔을 올린 뒤 청 황제는 용골대를 시켜 조선의 여러 신하들에게 고했다.
---pp. 197~199 굴욕의 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예를 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