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나의 견문과 학식, 나의 경험으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돌연히 동경하고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회화계를 동경했고 유럽과 미국 여자의 활동을 보고 싶었고 그들의 생활을 맛보고 싶었다.
--- p.19
오늘은 이왕 전하[영친왕]께서 인터라켄을 통과하신다. 하여 전하는 하차하시면서 우리말로 우리에게 언제 왔느냐고 물어봐주셨다. 오후 8시, 프리바자 식당에서 사이토 총독이 전하께 만찬을 올렸다. 겸하여 군축회의 각 수석, 차석 대표를 위시하여 지금 회의 관계로 체재 중인 대사, 공사 및 칙임관을 초대했다. 관등으로는 감히 출석하지 못할 우리 부부도 참가했다.
내빈 70여 명 중에는 영국 대표 프리드먼(현 해군대신) 씨 부부, 미국 대표 데이비슨 씨 부부 외 동행한 부인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부인이 적을 때는 여자가 상석에 앉을 수 있다. 그리하여 상관이 그 부인에게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하라고 알린다. 외교상 외교관 부인이 중요한 임명을 갖게 됨은 이러한 경우가 많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외교관 부인일수록 애교가 있고 날렵해야 한다. 내 오른편에는 캐나다 대표가 앉았고 왼편에는 영국 차석 대표가 앉았다. 이런 자리에서 어학이 능통했으면 유익한 소개가 많으련마는 큰 유감이었다. 어학이란 잘하면 도리어 결점이 드러나나 못하면 귀엽게 봐주는 수가 있다. 맞으면 다행이고, 아니 맞으면 웃음이 되어 도리어 애교가 되고 만다. 참 무식한 것이 한이 된다.
--- pp.45~46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사 참정권운동자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15일,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 p.76
누구든지 파리에 와 있다가 좋은 곳인 줄 아는 날에는 떠나기 싫어한다. 그리하여 먹을 돈은 없고 가기는 싫고 하면 갖은 참극과 비극이 다 생긴다. 그런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기분으로 살아가며 남을 속이고 빼앗기를 예사로이 한다. 파리 자체는 아름다운 곳이나 외국인들이 버려놓는다. 과연 파리 인심은 자유, 평등, 박애가 충분하여 누구든지 유쾌히 살 수 있으며 이곳을 떠날 때는 마치 애인 앞을 떠나는 것 같다. 나는 파리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떠나기가 싫었다. 좀 더 있어서 그림 연구를 하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미국을 들러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9월 17일 오전 9시 50분, 생라자르역에서 몇몇 지인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을 향해 떠났다. 얼마나 많이 파리 소식이 귀에 젖고 얼마나 많이 파리를 동경하든 과거가 되고 말았다.
--- pp.97~98
“여행은 길동무, 세상은 정”이란 말이 참 그럴싸하다고 새삼 감탄한다. 보이는 오른편 객실의 독일인 상인을 두고 게르만스키 놈은 부르주아라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 웃곤 했다. 어째서 부르주아냐고 물으니 타자기도 축음기도 사진기도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독일인도 붙임성이 좋았지만, 그와 같은 객실에 묵는 러시아인이야말로 여행하며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전세라도 낸 양 객실을 혼자 쓰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웃 객실로부터 차를 마시자거나 트럼프를 치자고 초대받았는데, 내가 엉터리 러시아어로 웃음을 줘서 귀여워했던 걸까.
--- p.159
18일에도 점심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민스크 씨와 단둘이 식탁에 앉았다. 수프(무 같은 당근이 조금 들어간), 신맛 나는 밀가루 음식(수제비에 식초를 뿌린 듯한), 메밀과 닭 뼈로 만든 요리가 전부였다. 나오기 전까지는 즐거운 공상을 하다가 막상 먹고 나면 낙담해버리는 식사. 저녁에는 베개와 깔개와 담요를 빌린 값으로 6루블이나 지불했다. 담요라고 해봤자 낡아빠진 감색 천 한 장이다. 짐을 귀찮아하지 않는다면 하얼빈 근처에서 담요 두 장을 사는 편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기차에서 베개나 담요를 빌리는 사람은 외국인뿐으로 내 이웃들은 베개부터 담요, 주전자까지 다 들고 다닌다. 어깨에 짊어진 짐 속에서 온갖 가재도구가 나오는 모습은 삼등 열차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림이다.
--- p.165
유럽행 삼등 열차는 마치 일본의 나룻배처럼 많은 사람이 떼 지어 줄줄이 걸터앉아 있다. 새벽에는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가족과 네댓 명의 룸펜 제군이 탔다. 그들은 금세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철포처럼 길쭉한 빵을 우적우적 베어 먹다가 불경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든다. 개중에는 고풍스러운 아코디언을 어깨에 둘러멘 예술가도 있는가 하면 붉은 목도리를 두른 아파슈[파리 밤거리에 출몰하는 불량배를 일컫는 말]풍 노동자, 발 한쪽이 없는 남자, 볼에 탄흔이 있는 노인, 귀여운 아이 등등 다들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발 없는 남자와 탄흔 있는 노인을 보니 베르됭전투[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프랑스가 벌인 최악의 전투]가 떠올랐다. 과연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기차 안에서까지 사이가 나쁜지 “이렇게 불경기인데도 구태여 옆에서 일하러 오는 건 참을 수 없어!” 건너편 칸에 있는 독일 노동자가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한다.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