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실은 ‘바로 지금 여기서 이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도 계속 흘러가므로 과거와 미래는 물론 현재 또한 금방 가상현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 p.25
생사는 한 조각 뜬구름의 일어남, 사라짐과 같다. 온 바도 없고, 간 곳도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이 있을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 부처가 보고 듣고 앉고 눕는다. 몸과 마음은 아바타요, 보고 듣는 이가 진짜 나다. 그렇다고 보고 듣는 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보고 들음이 보고 듣는 이다.
--- p.27
몸과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오늘의 몸과 내일의 몸도 다르다. 아침 · 저녁의 몸이 다르다. 또한 어제의 마음이 내 마음인가, 오늘의 마음이 내 마음인가, 내일의 마음이 내 마음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 몸과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변화하는 현상만 있을 뿐! 결국 몸과 마음은 아바타인 것이다.
그러니 불안한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아바타의 마음이다. 아바타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관찰하는 순간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관찰자인 성품은 공(空)하다. 크고 밝고 충만하다. 달이 항상 보름달인 것처럼.
--- pp.28~29
사람들은 대부분 가상현실에 묶여 살고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시간과 몸 · 마음이 위치한 공간에 묶여 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모두가 가상현실인 것이다. 또한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한다.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화하는 현상만 있는 아바타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나가 버린 과거를 근심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에 기꺼이 머무르고자 한다. 스스로 묶여 있는 것이다.
--- p.31
몸과 마음은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다. 몸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이 있을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한마디로 아바타인 것이다. 이렇게 관찰해야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
--- p.36
몸과 마음은 아바타다. 수미산 또한 명칭이 있을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우주가 온통 변하는데, 그 안에 있는 어떤 존재인들 변하지 않겠는가? 변화하는 현상뿐인 아바타에게는 실체가 없는데, 허물을 따져서 어쩌겠는가? (…) 육도윤회(六道輪廻) 또한 모두 가상현실 속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항상 ‘바로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진짜 현실을 사는 것이다.
--- p.43
산도 있고 물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것은 있고, 저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이다. 명칭이 있을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상대적인 유와 무를 초월한 ‘이것뿐!’이다.
--- p.51
탐 · 진 · 치 삼독(三毒)을 아바타에게 맡겨 버리면 삼독에서 분리된다. 비로소 해탈의 맛을 알아가게 되며 지혜가 발생한다. ‘마하반야바라밀’이다. 크고 밝고 충만해지니 온 우주가 내가 된다. 온 우주가 ‘견문각지’할 뿐, ‘견문각지’하는 자는 없다.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느껴지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아는 것을 알기만 할 뿐! 거기에 ‘그대’는 없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 p.107
몸이나 음성은 진정한 여래가 아니다. 여래의 아바타일 뿐! 결국 물질적 존재이든 정신적 존재이든, 모든 존재는 ‘아바타’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화하는 현상만 있다. 이를 직시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비결이다.
--- p.111
‘일천 강에 비친 달’은 아바타요, ‘청천 하늘의 달’은 관찰자다. 관찰자는 크고 밝고 충만하다. 사바세계에서 살다 보니 작아지고, 어두워지고, 결핍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것은 착시현상이다. 달은 본래 보름달인 것처럼 관찰자는 항상 크고 밝고 충만하다. 초승달이나 그믐달로 보이는 것이 착시현상인 것처럼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바타에서 관찰자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하반야바라밀’을 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 p.112
결국 이 세상은 메타버스이며, 인생은 한바탕 아바타 게임에 불과하다. 그 속에서 아바타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질없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길몽이든 악몽이든 꿈은 꿈일 뿐! 좋은 꿈을 꾸려 말고, 꿈에서 깨야 한다는 것이다.
--- p.116
운전 중 갑자기 신호도 없이 끼어드는 자동차가 있으면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화가 북받쳐 올라온다. 화는 참으면 병이 되고, 터뜨리면 업(業)이 된다. 하지만 바라보면 가라앉는다. ‘아바타가 화가 나려 하는구나.’, ‘아바타가 화가 올라오는구나.’, ‘아바타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몇 번 반복하면 서서히 가라앉게 된다. 화는 아바타가 내는 것이고, 정작 나는 이를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 pp.188~189
명상법을 중국에 최초로 전한 달마 대사는 명상의 주요한 마음가짐으로 ‘무소구행(無所求行)’을 강조했다. ‘구하는 바 없음’이야말로 참다운 명상의 전제 조건이다. 행복을 바라지 않음은 물론, 불행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과거세의 업을 갚는다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겨도 그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일이건 복 닦기와 도 닦기의 계기로 삼을 뿐이다.
--- p.125
아바타의 잘잘못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서는 안 된다. 이는 운전자가 비 오는 날 창문의 윈도우 브러시에 시선을 맞추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경우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 윈도우 브러시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전방을 주시해야 하듯 관찰자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 이때 윈도우 브러시는 오히려 길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번뇌를 통하여 관찰자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p.131
『금강경』 사구게의 핵심은 결국 ‘모든 존재가 마치 꿈과 같고 아바타(幻)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하라’는 것이다. 또한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몸과 마음 아바타(空)라 관찰하고 모든 고통 벗어났다’고 한다. 결국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아바타로 보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다.
--- p.147
깨달음이란 무언가를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얻으면 그것은 ‘얻는’ 것이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얻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성, 불성, 공성(空性)을 이미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또 얻는가?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온 세상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 p.149
마하는 큼이요, 반야는 밝음이요, 바라밀은 충만함이다. 나와 남을 나누지 않음이 진정한 ‘큼’이다. 인과를 굳게 믿는 것이 진정한 ‘밝음’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충만함’이다.
--- p.153
불교적 마음 치유의 대증요법은 ‘대면 관찰’이며, 근원치유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대면 관찰을 통해 무아를 연습하여 근심 걱정을 완화시킨다.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을 통해 무아를 넘어선 대아(大我)로 나아가 밝은 미래를 그리고 창조하는 것이다.
--- p.157
달은 항상 보름달이다. 다만 착시현상으로 반달이나 그믐달로 보일 뿐이다. 또한 태양은 뜨고 지지 않는다. 지구가 돌고 있을 뿐! 하지만 사람들은 일출과 일몰을 보며 태양이 뜨고 진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착시현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하는 아바타일 뿐 관찰자인 성품을 ‘참 나’라고 하는 것이다.
--- p.165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다. 재앙을 돌이켜 복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번뇌를 굴려 해탈의 계기로 삼는 것, 즉 전(轉)번뇌 위(爲)해탈이 지혜로운 삶이다. 번뇌는 끊어야 할 것이 아니라 활용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 p.169
웃을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일 년에 한 번 대보름날을 기다려서 소원을 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먼저 웃음으로써 웃을 일이 생기게 만드는 것은 행복의 창조자만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나날이 좋은 날인 것이다.
--- p.179
참선이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수행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원칙일 뿐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한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곧 몸의 좌선이며 마음의 화두 챙김(看話)인 것이다.
--- p.213
자성, 즉 우리 모두의 본 마음 · 참 나는 본래 완전하므로 더 이상 그릇됨만 없으면 자성의 계(戒)요, 더 이상 산란함만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더 이상 어리석음만 없으면 자성의 혜(慧)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행을 해나간다거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무엇도 추구할 필요 없이 다만 5분 앉아 있으면 5분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 p.215
바로 ‘지금’을 떠나 마음의 평화 또는 육체적 안식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편안함을 성취할 수 없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 성취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후회, 설움 등 일체를 놓아 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걱정 따위도 떨쳐 버린 채, 오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만 좌선에 몰두할 뿐이다.
--- p.216
도는 닦는 데 속하지 않는다(道不屬修). 닦아서 터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졌으니 다시 부서질 것이다. 즉 인과에 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면 그저 범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마조 스님이 설했다.
“자성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 p.218
평상심이란 평상시의 마음을 뜻한다.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듯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계에 부딪혀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인 것이다.
--- p.219
명상과 참선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둘 다 밖으로 향한 시선을 내부로 돌려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찰의 대상에 차이가 있다. 명상은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참선은 관찰하는 자를 관찰하는 것이다.
--- p.220
달마 대사에게 혜가가 말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我心未寧 乞師與安).”
대사가 말했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將心來 與汝安).”
혜가가 대답했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 不可得).”
대사가 다시 말했다.
“네 마음을 벌써 편안케 해 주었느니라(與汝安心竟).”
--- p.223
비유컨대 다른 명상이 아날로그식이라면 참선은 디지털식이다. 가령 5시라는 시간을 가리키기 위해서 반드시 3시와 4시를 거쳐야 하는 것이 아날로그식이라면 디지털식은 곧바로 5시를 나타내 줄 수 있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한 시간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