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진행한 ‘그랜트 연구(Grant Study)’ 결과를 보자. 268명의 남성들을 80년 동안 추적 조사해 얻은 이 연구에서, 연구 대상자들에 관해 축적된 데이터의 양이 방 여러 개를 채울 정도였고, 무엇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풍부한 통찰이 나왔다.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연구를 이끌었던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 교수에게 이러한 수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자 그는 한 문장으로 대답했다.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이다.’
---「머리말」중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친구들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핵심은 습관적 행위에 있다. 800만 건의 통화를 분석한 노트르담대학교의 연구는 ‘2주마다 어떤 형태로든 연락하는 것’이 우정을 지키는 데 좋은 목표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최소한의 주기를 지켜라, 그러면 우정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를 만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그 과정은 기내 인터넷보다 느릴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나이가 들면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제프 홀(Jeff Hall)의 연구는 가벼운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60시간이 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본격적인 ‘친구’ 상태가 되는 데는 때때로 100시간이 들고, 소문난 ‘베프’라는 성취를 이루는 데는 200시간 이상 든다.
---「8장: 친구를 만드는 법」중에서
만약 누군가의 나르시시즘이 중증 수준인데 당신이 그냥 피할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종 선택지는 두 가지다. 즉 경계선(Boundary)과 협상(Bargaining)이다. 먼저 경계선을 정하라. 당신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선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들이 그 경계선을 침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단호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만 못되게 굴지는 말라. 다음은 협상이다. 윈-윈에 초점을 맞추어라. 나르시시스트들은, 당신이 그들이 원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대개 협조할 것이다. 의도가 아니라 행동을 판단하라. 나르시시스트들이 당신에게 있어 무언가를 노릴 때, 임상 심리학자 앨버트 번스타인이 권하는 결정적인 신의 한 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수치심은 느낀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들은 표면상의 모습에 굉장히 신경을 쓴다.
---「9장: 우리의 적을 길들이는 법」중에서
제임스 페니베이커 교수는,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미 이 발견의 이면을 보았다. 가트맨이 4대 재앙 중 하나인 ‘비난’을 정의할 때 말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싸울 때 ‘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의 메건 로빈스 교수는 5,3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을 통해,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이 관계의 지속성부터 만족도, 정신 건강에 이르기까지 평가된 모든 측정 기준에서 성공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단어가 행복만 증진시킨 것도 아니었다. 심장질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6개월 뒤에 건강 상태가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14장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리는 기술」중에서
단지 대면 접촉만 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가져오는 건강상의 혜택들을 기억하는가? 148개의 종단적 연구들을 검토한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런스태드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7년의 기간 동안 사망할 가능성이 50퍼센트 더 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공동체의 면모가 가장 중요하다. 직원들과 보내는 시간이나 디지털과의 연결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당신이 정말로 잘 알고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만 더 오래 산다. 공동체에는 의무가 따른다. 하지만 부모가 되는 데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우리에겐 짊어질 짐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유의 길에서 좀 너무 멀리 갔다. 과도한 통제력을 가지면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양방향 도로를 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감정을 공유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18장 협력하는 유전자가 살아남는다」중에서
우리의 초개인주의적인 사회의 결과로써, 행복감은 줄어들고 우울증은 늘어났다. 우리는 항우울제의 플라세보 효과와 아편의 가짜 위안을 통해 대처하려고 애써 왔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동체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며, 자연재해가 이따금씩 현대성의 껍데기를 벗겨낼 때면 우리가 얼마나 천성적으로 선하고 협력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부터 몰로카이섬의 나환자들까지, 우리가 되풀이해보여준 것처럼 삶이 최악의 상태일 때 우리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위에 대한 욕구를 버릴 때, 공동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함께할 때’, 우리는 개인적 실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과도한 통제력은 필요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면, 너무나 놀랍게도 더 행복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장 인생은 원맨쇼가 아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