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3년 12월 20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24쪽 | 260g | 124*210*20mm |
ISBN13 | 9788937408205 |
ISBN10 | 8937408201 |
발행일 | 2013년 1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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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24쪽 | 260g | 124*210*20mm |
ISBN13 | 9788937408205 |
ISBN10 | 8937408201 |
1부 컵의 회화 진실게임 양파 공동체 후박나무 토끼 마트로시카 체스 책상 달력의 거리 내림 상자가 되고 싶은 나무를 회전하는 기차 고층 아파트 유리를 닦는 사람 초록 냉장고 체크 메이트 칠레로 가는 기차 소문 비핀나티피덤필로덴드론의 고백 2부 Rule 미끄럼틀 플래니모의 답장 젤리 앙코르와트 피아노 도플갱어 셋업 그루밍 굿 폰(Pawn) 죽은 말은 다시 사용할 수 없다 게임이 끝나는 시간 3부 방문자들 달은 떨어질 자격이 있다 컵의 회화 2 몇 온스의 숲 모두 지나갔다 Les Cenci 공중그네 달콤한 문 누가 있다 방문자들 왕의 서신 짐을 싸는 방법 물개위성 물개위성 2 누구도 열 수 없는 병 속에서 치통 고래불 해수욕장 못 작품 해설/권혁웅 사랑의 경로와 마이너스 우주 |
어떤 단어를 한동안 응시하다보면 전에 몰랐던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특히 순우리말. 환경미화원의 의무에 져 쓸려 버려야 했던 늦가을의 대표명사인 낙엽들.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소환하며, 한 아름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소슬소슬, 늦가을의 무력한 소연함과 함께 마시는 한 잔의 흑 커피. 오늘, 저 애는 존재감이 없이 어느 소슬이의 뱃속으로 추락했다. 슬프고 우울한 피로감에 지쳐.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 내 피가 돌고 /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 씻어 엎으면 /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 난간을 따라 걷자 / 깊은 곳에서 /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 살을 파고 / 모양을 그리면서 /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 문고리가 된다 /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컵의 회화’ )
그러고는 고독과 오랜 지기인 단어들의 회동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손미 시인의 『 양파공동체 』. 시집이지 않은가. 詩들이 모이는 집家이라 부르고픈 건, 나 또한 태생이 ‘고독’이라서 일게다. 겹겹이 쌓인 것들의 용도를 이리저리 재다 풀다 하는 일반인은 모르는 쓸쓸함을, 시인은 개성 있는 시어로 쏟아낸다. 혹 진작 좀 외로울 걸? 하고 계신가. 아니, 손미 시인의 시들은 기원 모르게, 한없이, 외로웠을 당신들과 나를 위한 위로이다.
-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 ‘양파 공동체’ 中 )
가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적함은 사물의 그것도 쉽게 알아본다. 옷걸이에 걸린 후줄근한 점퍼에게 표정과 동작을 입히고 있는 사람은 자주 고독으로 웅크린다. 무릎 깊이 파묻힌 뒤통수에게 말 걸어 줄줄 아는 백열등. 나는 그가 고마워 다시금 고개를 쳐든다. 잠깐이나마 밤 대신 낮을 준 그. 책상은 시인에게 백열등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 책상이 걸어와 / 내 귀퉁이를 핥는다 /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 나를 읽는 / 책상 이빨 /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 맨몸으로 뒤엉킨다 /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 ( ‘책상’ 中 )
빗방울 입은 미끄럼틀 앞에서 망연자실한 꼬맹이들, 그들을 바라보는 나. 그럼, 우리는 공동운명체? 우리에 속한 미끄럼틀에게 한 마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스러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너에게 심심한 위로를...’ 검박한 무료로도 거뜬한 너에게 따스한 입맞춤을 보내곤 하는 우리들의 발에게도. 가랑비가 내리던 어제, 덕분에 너는 하루 동안 사색할 수 있었겠다.
좀, 앉을게 / 구둣발로 들어왔다 / 여기 좀 있을게 / 네 속에 - / 몸을 말아 넣으면 /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 / 그만 좀, 앉을게 / 이제 / 나도 너의 살점인데 ( ‘미끄럼틀’ 中 )
제발 목소리 던져 줄 누군가라도 있으면, 다정하게 되받아쳐줄 텐데... 음악을 켠다. 이어폰을 낀 다크서클녀가 두려운 거울도 흐린 미소를 띤다. 그 앞에 누운 비누와 칫솔, 치약들도 저마다 짝이 있는데... 이런 생각들을 잡아먹는 낯선 이가 곁에 있다는 착각, 환청이 들릴 때가 있다.
- 번개 치는 날 / 거울에서 한 번씩 손이 나왔다 / 분홍 타이즈를 신은 아이가 제물대에 올라가고 / 어머니 신전에 있는 거울이 / 한순간에 꺼지는 날 - / 번개가 치면 내가 아닌 것들이 내린다 ( ‘누가 있다’ 中 )
그래, 우리끼리는 더 이상 외롭다 말자. 우리에겐 지척에서 크게 울어주는 시계초침이 있고, 간헐적으로 노래해주는 비가 있고, 무엇보다 가슴을 녹여주는 당신들의 詩가 있지 않은가. 지금 내 곁엔 당신의 시를 데워주는 컴퓨터까지 있다. 윙윙, 사뭇 아픈 소리를 내며 일하지만, 내겐 그것이 우리들의 고독을 대리해주는 것만 같다. 이토록 사물마저 시린 늦가을이다.
욕망의 저편, 응시의 에로티즘
- 손미, 『양파 공동체』
손미의 시에서는 부재하는 공간이 끊임없이 환기된다. 현실적으로는 ‘없는’ 공간이 시적 세계로 구현되는 순간 그녀의 시가 탄생한다. 이 세상에는 없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시인은 의미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끊임없이 시의 세계로 호명한다. 「후박나무 토끼」에서 그것은 토끼라는 사물로 표명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 후박나무 토끼가 시인을 “이상한 나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대목에 있다. 즉 후박나무 토끼를 통해 시인은 이상한 나라로 들어서는 길을 찾고 싶어 하지만, 토끼는 결코 시인에게 그 길을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판타지의 세계와는 어긋난 곳에서 토끼와 같은 사물들이 출몰한다. 엘리스의 판타지는 이 시에서 덧없는 꿈이 되어버린다.
똑같은 상상의 세계를 그렸는데도, 후박나무의 토끼는 판타지 세계의 바깥으로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다. 판타지의 바깥에는 그럼 무엇이 있을까? 판타지를 꿈꾸면서도 판타지의 바깥으로 애써 도망치는 이 토끼의 생태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발신자 번호를 지운 전화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것은/ 후박나무 뿌리가 전하는/ 잠깐의 기척”이라고 시인은 적고 있다. 확인이 불가능한 어떤 세계로부터 아주 가끔 신호가 온다. 누가 보낸 신호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온 신호인지도 모른다. 신호가 온다는 것은 이쪽이 저쪽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라는 물음이 유효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데, 그 물음은 존재의 기원을 묻는 일만큼이나 세심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후박나무가 미처
후박나무이기 전에
후박나무 토끼가
후박나무 토끼이기 전에
나의 머리가
너의 머리이기 전에
언젠가 본 적이 있지
검게 뜯긴 후박나무
나를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는
시끄러운 피가 흐르고
- 「후박나무 토끼」 부분
존재-사물은 어떤 하나의 기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의 기원을 묻는다는 것은 곧 존재의 바깥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의 한국시를 관통하는 ‘바깥을 향한 사유’는 이런 점에서 존재의 기원은 없다는 점을 에둘러 드러내려는 시적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손미는 위 시에서 후박나무가 되기 이전의 후박나무를, 토끼가 되기 이전의 토끼를 상상한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그러므로 끝이 있을 리 없다. 존재의 바깥을 이야기하는 순간, 또 다른 바깥이 존재의 바깥을 감싸 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원을 묻는 순간 시인은 우주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한 번 들어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은 존재와 관련된 어떤 물음도 가차 없이 흡수해버린다. “언젠가 본 적이 있지?”라는 기시감(旣視感)이 전혀 미치지 않는 암흑세계는 이렇듯 손미 시의 근본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후박나무 토끼는 그 세계의 어느 지점에서 끊임없이 시인에게 신호를 보낸다. “언젠가 본 적이 있지?”라는 물음이 시인의 물음이 아니라 토끼의 물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박나무 토끼는 분명 이 시의 화자에게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 토끼가 되기 전, 그러니까 무언가로 존재하던 그 시기부터 토끼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통의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신호는 듣는 존재에게만 비로소 신호가 될 수 있다. 사물이 내보이는 본질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신호가 오는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해야 한다.
기원에 대한 물음에는 무엇보다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적 맥락이 배제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의 화자에게 후박나무 토끼는 의미의 바깥을 가리키는 기호로 나타날 뿐이다. 언젠가 본 적이 있다는 기시감으로 열릴 세계였다면, 애초부터 후박나무 토끼는 의미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신호를 화자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의 기척”으로 다가온 신호는 이를테면 “나무를 알몸으로 통과하는/ 빗물의 통증”(같은 시 5연)과 다르지 않다. 알몸으로 빗물을 맞는 순간 나무는 빗물의 통증을 느낀다. 빗물의 통증은 돌려 말하면 나무의 통증을 의미한다. 나무와 빗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이렇게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찰나에 그 의미를 발산한다. 그러므로 의미는 곧바로 무의미가 된다. 나무가 빗물의 통증에 집착하면 정작 나무로부터 전해오는 통증은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손미 시의 블랙홀은 이 지점에서 저마다의 사물에 내재된 통점(痛點)과 마주한다. 사물의 통점과 마주해야 사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 와
내 귀퉁이를 핧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 「책상」 전문
책상과 마주보기 위해 시인은 기꺼이 책상다리가 된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는 상황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는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응시는 일방적인 시선이 아니다. ‘나’가 보는 사물 또한 ‘나’를 보고 있는 상황이 응시의 시적 맥락이라면, 손미는 이러한 응시의 시학을 통해 사물과의 마주보기를 시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향한 응시의 미학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생각은 사물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사물을 보는 자의 시선은 사물의 본질을 재단하려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응시는 시선처럼 시각적인 현상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촉각적인 현상을 불러낸다. “책상이 걸어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러면 내 몸에서는 과즙이 흘러나온다. 응시의 에로티즘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에로티즘은 생명의 향연을 의미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펼치는 에로티즘의 미학은 책상이라는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아니, 책상이 내 몸에 과즙을 흐르게 한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시선의 너머에 응시가 있고, 그 응시가 바싹 마른 몸에 생명수를 적신다. 응시의 에로티즘은 이처럼 “맨 몸으로 뒤엉키는” 적나라한 상황 속에서 펼쳐진다. 내 몸을 열지 않으면 사물 역시 제 몸을 열지 않는다. 이것이 에로티즘의 단순한 법칙이다. ‘욕망’이라는 말로는 채 표현할 수 없는 응시의 에로티즘은 이로써 손미 시의 중심에 배치되고 있는 셈이다.
응시의 에로티즘은 서로의 몸을 세심하게 읽는 과정을 내포한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에 나타나듯, 에로티즘은 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생의 열망을 일깨운다. 나 스스로 책상의 다리가 되는 이 순간은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여전히 실현되기 힘든 상황에 빠져 있다.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사물과 나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의 거리는 희열의 중지를 가리킨다. 세상은 가짜 희열로 넘쳐난다. 무언가를 향한 욕망은 들끓지만, 그 욕망들은 정확히 시선의 광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에로티즘의 생명성이 사라진 이 광장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욕망이다.
「상자가 되고 싶은 나무를 회전하는 기차」에서 시인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한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에 드러나는 것처럼, 기차는 상자가 되고 싶은 나무를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기차에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수많은 골목들이 있지만, 기차가 그 골목들의 어딘가를 목적지로 해서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기차는 목적지가 없이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 그곳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살인의 대상은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인 존 레논과 선생이다. 존 레논-선생이 누구인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세상을 속였고, 그래서 ‘나’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살인이 “세상을 속이는 법”의 하나로 이 시의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세상을 속이기 위해 살인을 한다. 세상을 속인 사람들을 죽이는 게 왜 세상을 속이는 법이 될 수 있을까? 기차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정작 도착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지 않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비유인 것일까? 세상을 속인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고 끊임없이 다그친다. 우리들 또한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고 소리친다. 속임의 연속이다. 기차라는 허구의 공간에서는 이처럼 서로에게 속고, 서로를 속이는 욕망의 무한질주가 벌어지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무한질주의 공간에 “절름발이 에밀리”를 배치한다. “에밀리는 기차에서 이방의 골목을 팔고, 다른 살을 팔고, 아름다운 피 모양을 판다.” 그녀는 욕망의 악순환에 빠진 사람들을 체스판에 세운다. 그녀가 파는 온갖 것들은 그러므로 체스판의 말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도구들, 곧 세상을 속이기 위한 도구들이다. 그녀는 기차의 목적지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으며,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 한 그 순환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우리는 체스판에 세워진 말들이다. 주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말들의 운명은 달라진다. 욕망의 무한질주에 빠진 현대인들의 운명이 체스판 위의 말들보다 나을 리는 없다. 존 레논을 향해, 선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화자-시인은 그들을 체스판에 세운다. 세상을 속인 사람들의 운명이 이제는 에밀리의 손에, 시인의 손에 달려 있다. 손미는 체스판 위에 놓인 그들의 운명을 하나하나 주무르기 시작한다. 그녀만의 시작법(詩作法), 곧 세상을 속이기 위한 방법의 실현이라고나 할까?
응시의 에로티즘을 실천하기 위해 그녀는 시작을 통해 세상을 속인다. 바지가 제 고향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고, 죽은 아이가 첫 번째로 죽은 사람의 그림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 후박나무의 토끼는 지금도 우리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들, 곧 시적 사건은 그녀가 체스판 위에서 벌이는 속임수이다. 하지만 속임수면 어떤가? 욕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한다면, 그녀의 속임수의 끝에는 응시의 에로티즘이 있다.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가 있다. 시(詩)라는, 그녀만의 독특한 속임수의 세계가.
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시집 서평 중에서-
시집을 읽으면서, 위의 서평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시집 '양파 공동체'가 보여주는 시적 사유와 정서의 세계의 지평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 시집이 단순히 우리가 모르는 우주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시인의 언어에 언뜻 무책임함과 예술 본연의 '막연한 정서'에서 그침을 증명하듯 보이기 때문이다. '양파공동체'는 '컵'을 두고 말하는 대상과의 회화이며, '플래니모'로부터 온 답장이며, 식물적 언어 혹은 세계의 어떤 '고백'이다. 즉 위 시집은 단순히 '보여주는' 시집이 아니며, 필시 어떤 '초대장'이다.
시인은 자신만의 우주를 증명하고 안내해주려 한다. 다시말해 '초대'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있는 '이상하게 있음'(권혁웅)의 형태로 양파 공동체는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목 없는 의자에 앉아'(본문 '굿' 중) 그 세계를 즐길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이라고 하고, 또한 '세계를 뒤집어 보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양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확한 정의는 아니다. 양파는 뒤집어도 양파이지만, 같은 것이듯. 시인은 세상을 무리하게 뒤집으려고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의 기록과 상처와 그를 통한 몽상을 하나의 길로 이어 '자신만의 각도'를 창조한다. 그리고 세상을 '이상하게' 본다. 이상하다는 것은 삐딱하게도, 뒤집어서도 보는 게 아니라, 다만 '신비로운' 것인데, 우리는 이 반물질적 이상함 속에서 '즐겁게 헤매다' 보면 홀연히 느끼게 될 것이다. 바른 세계를 우리가 이상하게 보는지, 이상한 세계를 오히려 (우리의 몽환적 자아의 눈에서) 똑바로 보고 있는지를.
결국 '우리는 무덤 속'에서 만난다. 그것은 똑바르고 고독한 세계의 '무덤 속'이고(자서), 외롭고 아름답고 이상한 시의 세계일 것이다.
시인은 어떤 철학적 사유나 수심이 깊은 곳에서 끌어낼 난해한 이지적 성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찌보면 '반물질적' 세계에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시인은 그것을 '체스판'이나 '달력'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무의미한 세계, 죽음 이후와 닮아있는, 그러나 살아있는 그 세계를.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양수의 세계를 살아오기에 바빳고, 그러기에 슬펐음을 안다. 시집을 읽으면서 작자와 적절한 소통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파'를 통해 양수의 '이 세계'에 저 세계의 '음수'가 흘러들고 있음을 느낀다.
저 외계로부터 온 편지같은 시집이다.(플래니모의 답장)
외롭고, 따뜻하고, '이상한'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