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도 없는 공간이 생생해지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제가 체감한 독일의 여유, 재촉 없는 미련한 문화, 장애인을 위한 시설, 비건을 포괄하는 식문화, 답답한 행정 절차, 햇살 좋은 날 북적이는 공원, 각자의 소수자성과 비주류성,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어떻게 저로 살 수 있었고, 단단해졌고, 또 쉽게 유약해졌고, 충만했는지를 많은 분들께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중에서
무언가에 대해 들어서 아는 것과 ‘나’라는 주체를 통해 직접 경험하는 것은 좀 다르더라고.
--- p.14
내 첫 자취 생활이자 첫 해외 생활은 이렇게 나만이 채울 수 있는 그릇을 만들었어. 원래는 남들의 인정과 애정으로 채워지는 그릇만 있었고 그게 차야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었다면, 여기서는 내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란 게 생겼어. 나는 두 그릇의 크기가 남들보다 좀 큰 편인데, 그 대신 두 그릇이 가득 차면 남들보다 큰 힘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지.
--- p.23
독일어의 모든 인칭 명사는 무조건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 구분하여 작성해야 하고, 메일을 보낼 땐 상대방의 성별에 따라 인사말이 달라져. 직업 명사의 기본형은 무조건 남성형이고, 사람(people)이라는 뜻의 ‘man’이라는 대명사를 반복할 때면 남성을 이르는 단어가 기본값이야. 이렇게 모든 인칭 명사의 기저에 이중적인 성별 구조가 있어. 상대가 나의 성별을 규정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는데, 철강 영업팀에서 인턴으로 일할 땐 철강 무역직의 대부분이 남자라는 이유로 ‘Herr(Mr)’라 불리곤 했어. 외적으로 인지되는 성별과 자신이 내적으로 규정한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독일에서는 곤란할 일이 더 잦을 것 같아.
--- p.43
나는 무해한 사람이고 싶어. 누구에게든, 나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러기 위해 말로 티끌만 한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모든 사람을 존중할 언어와 행동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누군가가 그 사람 자체로 사는 데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 다수가 아닌 소수일지라도 모두의 정체성을 배워가며 살려고 해. 물론 완전하게 누군가의 삶에 이입하거나 그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존중할 방식을 찾으려는 거야.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법적이지 않다면 어떤 것이든 그 사람을 이루는 요소들은 존중받아 마땅하잖아? 세상의 사각 지대에 위치한 사람들을 공부하고 이렇게나마 존재를 보여지게 하는 게,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내 나름의 방법이야.
--- p.46
프랑스에서는 자유를 중시하고 이를 거침없이 표현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길거리 곳곳에 걸린 자유분방한 프랑스어 문장이 눈에 들어왔어.
--- p.54
정확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 사는 여성의 삶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더 이상 아득한 이야기가 아닌 거야. 이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겪은 세상이라고 하니까 정신이 확 들었어.
--- p.59
이 외에도 첫 시간에 나를 중국인으로 낙인찍는 교수님, 두 명이 두 메뉴를 주문했는데 커틀러리 한 세트만 제공하고는 하나를 더 받으려면 1유로의 서비스 차지를 지불하라던 식당, 내 눈만 마주 보지 않고 대화하는 외국인 친구도 있었어. 그 외에도 나를 쫓아오며 말을 건다거나, 큰 행동과 소리로 위협하는 유형의 인종차별도 물론 발생하고.
--- p.92
프랑스에 산 지 반년 됐을 때까지만 해도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고만 생각했는데 반년이 지나고는 생각이 바뀌었어.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프랑스 학생도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 한국에서 어쭙잖게 주워들은 이야기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프랑스 학생을 보고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 공부는 안중에도 없고, 매일 밤이 ‘파뤼투나잇’이고, 대학 평준화로 대입 걱정 없고, 거기다 학비도 싸고, 취직한 이후에는 매년 여름방학이 있고.
--- p.98
환경을 중시하고 다양성을 고려하는 독일의 또 다른 문화는 비건이 아닐까 싶어. 두 번째 편지에서도 언급했듯, 어떤 식당이든 비건을 함께 고려하는 문화는 모두의 식탁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었어.
--- p.132
이번 여름을 돌아보자. 프랑스는 한여름이 일주일도 채 안 될 정도로 짧았어. 여름을 스쳐 봄에서 가을로 직행했거든. 7월에 내리쬐는 햇살이 없으니 이상하긴 하지만 무더위보다는 좋았지. 프랑스가 폭염을 피하는 행운을 누릴 동안 옆 나라에서는 물난리가 났어. 독일 서부에 72시간 동안 시간당 최대 180mm의 폭우가 쏟아졌고 홍수로 인해 156명이 사망했어. 불충분한 폭우 및 홍수 대비도 문제였지만 독일에 기후변화가 닥친 사실도 명확해.
---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