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
이스라엘이 쓸데없다고 버렸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행 4:11), 종으로 팔렸던 요셉이 이집트를 다스리는 “치리자”가 되어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의 형제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요셉의 꿈대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떨고 있었다(창 45:3). 사실상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은 요셉에게는 원수나 다름없었지만, 요셉은 그들에게 “진노의 잔”(사 51:17)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며 그들에게 “축복의 잔”(고전 10:16)을 내밀었다.
“죄”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징계가 먼저이고, 그 후에는 죄에 대한 용서와 더불어 그로 인한 화평이 주어진다. 무엇보다도 용서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행 4:12).
따라서 자신에게 저질러진 그와 같은 모순된 행동을 견뎌 내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죄들이 용서되었듯이,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쳤을지라도 죄를 용서하는 열쇠는 요셉에게 있었다(고후 6:2). 무엇보다도 이 모든 죄에 대한 용서 뒤에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녀 짓을 하였어도 내게로 다시 돌아오라.”(렘 3:1)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손을 내미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 죄인들”을 향해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고 계신다(요 3:16).
“잔”으로 시험하는 요셉(창 44장)
1. 청지기에게 내려진 명령(1-6절)
요셉의 청지기는 식량을 구하러 온 그들을 모함하여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요셉의 명령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은 채 그대로 행했다(1-6절). 비록 그는 요셉의 심중에 있는 깊은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있는 그대로 행한 것이다. 이처럼 청지기의 자세는 자기 생각보다 더 높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고 가장 먼저 주인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잠 3:6, 사 55:9, 눅 5:5, 고전 4:2).
2. 죄인들의 어리석은 맹세(7-10절)
64.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창 41:39 vs. 잠 8:12, 마 11:19)
65. 집을 치리하는 존재(창 41:40 vs. 히 3:3)
66. 말씀을 통해 다스리심(창 41:40 vs. 요 1:1-3, 히 1:3)
67. 신격(삼위일체)의 제2격이신 분(창 41:43 vs. 요일 5:7)
요셉의 형들은 자신에게 닥칠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엄청난 맹세를 해 버리고 말았다(9절). 이것이 바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음이다(마 12:37, 눅 19:22). 베드로 또한 모두가 주님을 배신할지라도 자신만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이처럼 죄인들은 결코 주님을 앞서갈 수도 없고, 결코 앞서가서도 안 된다. 결국 어리석은 맹세로 인해 그들은 요셉 앞에서 자기들을 변론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롬 14:11,12).
3. 회개에 이르게 하는 “진노의 잔”(11-14절)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집트로 돌아올 때와는 달리 요셉의 형제들은 융성한 대접과 풍성한 식량을 얻게 되었다. 특히 시므온과 베냐민을 보게 될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은 가벼운 걸음으로 고향으로 향했다(43:34).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마 26:55) 그들은 결코 그와 같은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결국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 곧 “진노의 잔”이 발견되고 말았다(12절). 요셉의 의도에 따라 베냐민이 고소를 당했지만(마 27:12, 행 26:7), 그들은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은 베냐민만 버려둔 채 식량과 모든 것을 가지고 고향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드디어 그들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된 것이다(눅 15:14-17). 주 하나님께서는 “하나는 없나이다.”(창 42:13)라고 하면서 요셉에 관해 고하던 그들의 솔직하지 못한 양심을 섭리 가운데서 살아나도록 이끌고 계신다. 이처럼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롬 10:9,10).
4. 요셉 앞에 서 있는 죄인들의 회개(15-33절)
이번에도 유다가 형제들보다 앞서서 그들의 유죄를 자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나이다.”(16절)라는 유다의 고백은 요셉에게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들을 위해 마련된 은혜를 받을 마음이 준비되었음을 보여 주는 진솔한 고백이었다. 이것은 죄인들이 하늘의 문 앞에 다다른 상황과 유사하다.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되, 그 어떤 책임 회피나 핑계를 대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오직 세리와 다윗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뿐이다(눅 18:13, 시 51편).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이 온전한 회개인지 알고 싶었고, 이에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남고 돌아가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았다(17절). 이때 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막내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지대한 사랑을 호소하며, 자신의 목숨을 베냐민을 위한 담보로 내놓겠다고 말했다(33절). 이제 요셉은 형제들 앞에 자신을 드러낼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의 진정한 마음만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눅 18:13).
6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짐(창 41:41,43,45; 42:6; 45:26 vs. 마 28:18)
69. 영화롭게 되심(창 41:42 vs. 요 12:28; 13:32; 16:14; 17:1,5)
70. 의로우심(창 41:42, 계 19:8 - “세마포” vs. 사 61:10, 롬 10:1-4)
71. 신성(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창 41:42 - “금사슬” vs. 딤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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