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가장 좋은 접근방법은 “가나안”과 “가나안 사람”을 야웨 신앙 운동을 극심하게 반대했던 사회적 현실의 전체 체제(total system)에 관한 이념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다. 가나안 사람에 관한 특별한 본문들을 읽을 때, 그들에 관한 임시적이고 일화적인 자료는 아마도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체제 충돌의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Yahwistic) 운동 또한 전통적 사회질서에 대한 혁명적 도전으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야웨는 현 상황(status quo)에 대한 지속적 도전으로서, 이스라엘 안에 구현된 사회정치적, 경제적 대격변을 보증한다. 이스라엘의 기억에 따르면, 이러한 도전은 폭력적 방법들로 실행된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10장에 나오는 바알 숭배에 대한 정화는 얄팍한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주요 상징을 공격함으로써 생산과 분배에 관한 전체적인 공적 체제에 도전하고 이를 대체하려 는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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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야웨가 듣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우상들”이 마찬가지로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상들은 사실상 자유로운 실제적인 대리자가 아니기 때문이 다(왕상 18:26; 시 115:6; 135:17을 보라). 야웨는 즉각적 응답의 교류가 가능한 실제적 동반자로서 우상들과 대조된다. 우리는 인간 피조물과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이에 관련된 그러한 “듣기”에 어떤 종류의 거래들이 관련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직접적인 경우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확실히 권위를 받은 인간 대리자들이 많은 활동을 중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듣기는 언약의 독특하고 특별한 훈련이자 특징이다. 경청한다는 것은 자율성과 자기 충족을 넘어서, 또 다른 명령하는 권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안식일을 보라]. 현대의 “주체로의 전환”, 즉 “나”에 대한 과도한 몰두는 자기 선언(self-announcement)이 인간 삶의 전제인 반응적 경청을 폭넓게 대체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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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체류는 이스라엘의 제의적 삶과 역동적 전통화 과정의 주제에서 많이 기억된다(시 78편, 105편, 106편을 보라). 광야에 관한 본문의 최종 형태가 포로기의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광야”가 “포로기”에 대한 효과적 비유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억된 광야 공동체처럼, 포로기의 공동체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고 야웨의 언약 백성을 위한 정상적 생계 수단들을 결여하고 있는 환경에서 야웨에 의해 놀랍게 주어진 생계 수단에 의존한다. 따라서 포로기를 통 해 여과된 광야는 오직 야웨만을 신뢰하는 신앙의 상태를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적절한 생명의 원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포로기의 맥락에서 사 55:1-2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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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초기 이스라엘에 대해 기억되는 지파 경제는 소작농들이 서로 의존하고, 농업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빈곤의 위협을 안고 살았던 이웃 경제(a neighborly economy)에서 필수적이었다(예를 들어, 출 22:1- 15를 보라). 이러한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들이 갖고 있었던 부를 공동체의 더 어려운 구성원들과 공유했던 다소 분배적 경제 활동의 출현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분배적 정의감이 실제로 농경의 현실성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관습은 바로 야웨의 성품에 뿌리를 둔 언약 적 요구사항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볼 때, 우리는 이러한 초기의 전통 들에서 이해되었던 야웨의 성품의 어떤 것이 사회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과, 또한 공동체가 특징적으로 과부, 고아, 나그네로 열거되는 가난하고 취약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동반된 인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인식할 수 있다(신 24:17-2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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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현현의 문학 장르는 항상 파악하기 힘들고 항상 그 어떠한 설명적 능력 너머에 있는 만남들을 다룬다. 신 현현의 수사학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직접적 대면을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한 수단이지만, 이 수단의 불충분함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다. 바로 그러한 불충분함은 하나님의 원초적 실재(raw reality)가, 만약 그것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인간의 범주화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확신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초월성, 거룩함, 그리고 신성한 영광의 이러한 영역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에 관한 보도는 물론 더욱 넓은 신앙의 표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지속적 신앙은 바로 그러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남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부족한 이 보도의 불충분함은 사실상 그 자체로 사건과 보도 사이에 있는 불가피한 비교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에 관한 증거이다. 기억해야 할 핵심요점은 항상 우리의 파악과 이해를 벗어나는 사건의 보도를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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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여러 설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 불가능한 고통 속으로 하나님 자신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깊고 위험한 공동의 친밀감에만 관심을 둔다. 모든 합리적 해결책을 거부하는 신정론의 위기에 대한 대인관계의 반응을 보여 주는 주요 증거는 탄원시와 항의의 시에 있다. 그것들은 특징적으로 고통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참여적 임재(attending presence) 때문에 기쁨으로 끝난다.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성서적 접근은 근본적으로 목회적이고 관계적이지, 논리적 설명으로 끌려가기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한 설명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입장은 괴로움과 희망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고 움직이게 하려는 항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징적으로 그러한 항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보살핌, 생명 유지, 그리고 긍휼을 제공하는 주의 깊은 관심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어떠한 도덕적 계산논법에도 갇히지 않을 것이고, 임재(presence)와 연대(solidarity) 안에서 그러한 계산논법을 무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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