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을 앞두고 심란한 마음을 들여다보자. ‘모임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적힌 커다란 마트료시카를 앞에 둔 상황. 마트료시카를 열어본다는 건 마음을 열어본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한 사이즈 작은 인형이 들어 있어 ‘그 모임은 어딘가 불편해’라는 마음이 적혀 있다. 뭐가 불편한지, 왜 그런지, 계속 파고들다 보면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마트료시카, 더는 열리지 않는 핵심 마트료시카가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쓰여 있는 채 발견되는 일이 바로 수치심을 가진 사람의 내면이다. 겉마음과는 영 딴판인 것이다.
---「마트료시카의 가장 깊숙한 곳」중에서
집을 나설 때마다 진짜 나를 두고 나오는 기분이 든다. 현관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거울 속의 나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밖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그래야 세상에 수용될 수 있어. 진짜 나는 혼자 있을 때 실컷 되면 되잖아. 지금부터는 내가 쓰기로 선택한, 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는 거야.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나를 꾸밈으로써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응하는 방식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가면의 비극」중에서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대체로 노력보다 큰 성과를 내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오래 앉아 있던 나무 책상의 감촉, 책상에 앉아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작은 창문 속 밤하늘의 냄새, 늘상 학교 서랍에 넣어두는 수학 교재의 빛바랜 색깔 같은 것을 떠올렸다. 기울인 노력의 정도에 대해 스스로 아는 것은 절대적인 수준일 뿐, 상대적으로 남들은 얼마큼의 노력으로 얼마큼의 성과를 내는지 알지 못하니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정말 그런 걸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도 하소연이나 불평을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노력이 뭉개지는 기분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성취는 인정받았지만 과정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럴수록 더욱 완벽한 인정을 향한 욕구에 시달렸다.
---「성취라는 덫」중에서
밤마다 사라지는 회사 책상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버티기보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을 버려버린 건 적성과 성향에 맞지 않은 업무와 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주류가 될 자신과 가능성이 없어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천하를 호령할 야망을 펼치려 할 때 마주할 시선과 평가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주류 되기와 도망치기」중에서
우리는 뭐든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 하는 과제를 받아 든다. 여자다운 여자란 무엇이든 되려고 나서고, 돌진하고, 주관을 갖고 밀어붙이고, 탐험하고 깨지고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성나게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아니다.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그것은 제한이 아니라 너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포장한다.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하면서, 실패했을 때는 더 가혹한 비난을, 성공했을 때는 덜 화려한 상찬을 내린다. 앞길을 닦아줄 생각은 없이 그저 뒷짐을 진 채 진정으로 원한다면 어떤 방해물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거라고 내게로 책임을 넘길 뿐이다. 모름지기 여자란 잘남을 현명하게 숨겨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되기를 진실로 격려받을까? 너무 똑똑하고 잘나가는 여자는 악바리이거나 독한 것, 잘난 척하고 거만하고 재수 없다고,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인생의 한쪽에만 치우쳐서 다른 것을 놓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을까?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 같은 것」중에서
헛똑똑이라는 명칭부터가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가 텅 빈 존재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헛’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느낌 때문일까? ‘헛’ 나는 텅 비어 있다. ‘헛’ 나는 쓸데없다. ‘헛’ 나는 잘못되었다. 똑똑함을 전제하고 있으나 빈틈이 똑똑함까지 집어삼킨 단어. 똑똑함마저 아무 소용 없어진 단어. 나는 똑똑함을 정체성으로 삼았었고 그렇기 때문에 헛똑똑이라는 단어는 정체성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헛똑똑이라는 갑절의 욕」중에서
오후 세 시쯤 집을 나서서 병원에 가거나 은행 업무를 처리하거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거나 허리 통증을 줄이기 위한 산책을 하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운동 스튜디오로 향하는 일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부끄럽다. 남들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 오전 아홉 시에서 오후 여섯 시 사이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경 쓰인다. 병원과 은행과 마트의 직원에게, 택시 기사에게, 그저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기대어 지내는 존재처럼, 잉여의 존재처럼 여겨지지는 않을까? 오후 세 시의 집 밖의 나는 어딘지 당당하지 못하다.
---「오후 세 시의 수치심에 관하여」중에서
이름이란 존재가 세계와 만나는 지점이다. 세상으로 향하는 경계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어젖혀지는 순간이 바로 이름을 부르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이다. 자아와 세계가 만나는 경계에서 생겨나는 수치심과 본질이 맞닿아 있다. 그러니 나는 그것이 두렵다. 문밖의 세계에서 예상치 못하게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당황하고 긴장하고 얼어버린 내 모습은 얼마나 엉망일까,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리하여 “주연아”라고 불리면 나는 아주 잠깐,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짧게, 1초를 수만 번 나눈 시간 동안, 바짝 얼었다 풀린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탁 되었다가 놓여난다. 나를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내면에는 굉장한 회오리가 일었다 가라앉는다.
---「이름이란 존재의 서걱거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