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을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믿음을 통해 매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 새로운 수준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관계들이 변화된다. 나 자신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23p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중에서
“오소서, 주 예수님.” 하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미 여기에 와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오심을 기억할 때, 나의 의식 안에 점점 더 현존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신다. 변하는 것은 우리다. 이 과정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그 현존을 온전히 따르고, 그분의 현존 안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에 더 민감해진다. 그러면 기도하는 동안 그리고 일상 안에서 성령의 은사가 적절히 드러나는 신적 에너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27p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중에서
성령의 열매들은 복음의 새 포도주다. 이 포도주는 우리를 하느님의 힘과 확신에 찬 자발성으로 채워 준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나 스스로 자유로워진 정도에 따라 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이는 방종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민감성이 지속적으로 증대된 것이니 말이다. 토마스 머튼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의 행하심에 대한 보증은 자비에, 자비 안에, 그리고 자비 안에 있다. 성령의 열매들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스스로를 완전히 변화하도록 하여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현존의 증인이 되도록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향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다.
---「44~45p ‘성령의 열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아홉 가지 열매’」중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는 내 안에서 사랑의 향주덕이 자라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사랑이 확고히 자라남에 따라 모든 은사들은 점점 더 뚜렷이 드러난다. 이 은사들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가락처럼 손을 뻗는다거나 코를 만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장하게 되면 이 손가락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연주한다거나 훌륭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엄청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진리의 놀라운 도구가 된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일곱 가지 은사와 함께 있다. 일곱 가지 은사는 세례를 받는 순간이나, 세례를 받고자 하는 순간에 우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온다. 그래서 하느님을 진실하게 찾는 모든 이들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51p ‘성령의 은사 ─내 안에서 자라는 하느님 사랑’」중에서
경외의 은사는 나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항상 진실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은사는 우리에게 사랑의 진리를 알려 주어서, 자기방어나 안전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한다. 경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충성심이기도하다. 즉, 상황이 어떠하든 옳다고 믿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80p ‘경외의 은사─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용기’」중에서
위로는 희망을 가지는 데에서 온다. 희망이라는 향주덕은 지식의 은사로 정화되고, 이 은사를 완성한다. 향주덕인 희망은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희망은 내가 과거에 했던 일의 잘잘못에 근거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이 세상에 가장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은 과거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은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이 자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134p ‘지식의 은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중에서
깨달음의 은사는 계시된 진리가 의미하는 바를 신앙으로 완전하고 깊게 하며, 빛을 비추어 주고, 우리가 동의하는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이는 거룩한 삼위일체나 하느님의 엄위하심의 일면일 수 있다. 혹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일 수 있고, 고해성사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일 수 있다.다른 말로 이는 단지 우리가 믿고 동의하는 것에 대한 확언이 아니다. 깨달음의 은사의 특성은 살아 있는 신비 체험이다. 한두 번 체험한 이런 깨달음은 인생에서 지속될 수도 있고, 우리의 영적인 삶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150p ‘깨달음의 은사 Ⅰ─ 우리 신앙의 진리를 밝혀 주는 빛’」중에서
가끔씩 교리상의 신조가 체험으로 폭발한다. 그 특별한 때에 내가 받은 것이 모든 성인들의 통공의 생생한 체험이라고 생각된다. 그 교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한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이승에서 봉사하려고 노력했던 이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며 나를 돕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머지않아 그들과 합류할 수 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을 하든지 어느 날에는 되돌아 올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조차 물리적인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은 상호 연계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다. 우리는 하나의 원천에서 왔고, 하나의 끝을 향해 가는 운명이다. 어떤 이들은 좀 더 멀리 가고, 어떤 이들은 뒤쳐지나 다시 일어선다.
---「161p ‘깨달음의 은사 Ⅰ─ 우리 신앙의 진리를 밝혀 주는 빛’」중에서
깨달음의 은사는 우리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하느님만이 나를 강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이는 극심한 고통 중이나, 혹은 기도 생활 안에서 점차적으로 발전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참혹한 비극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저지를 수 있는 악행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수 있다. 이 날카로운 빛 안에서 내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우쭐대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 나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거나 엘리트라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하느님과 다른 이들에게 여태까지 되돌려 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무한한 빚을 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 이 밤 안에서 모든 게 불타서 사라진다.
---「172p ‘깨달음의 은사 Ⅱ─ 고통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