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대담한 컬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햇살 가득한 배경 아래 슈거 핑크, 브릴리언트 블루, 트로피컬 그린 등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인플루언서들이 피드를 밝게 장식한다. 컬러는 정치와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과거 여성 참정권 운동에 경의를 표하고자 미국 의회 의원들이 입은 흰색 바지 정장에서부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이들의 화사한 색의 코트까지. 청년 계관시인 어멘다 고먼(Amanda Gorman)은 카나리아의 노란색을, 영부인 질 바이든은 하늘색을, 미셸 오바마가 꾸민 담자색은 색을 통한 의식적인 행위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인적이 드문 뉴욕 맨해튼 5번가에 동이 트자 티파니 본점에 택시가 한 대가 멈췄다. 블랙 롱 이브닝 드레스와 선글라스, 커다란 진주 넥 초커로 꾸민 여성이 택시에서 내린다. 그녀는 손에 든 종이 포장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꺼내며 티파니 상점 안에 진열된 보석을 탐내듯 바라본다. 여성의 이름은 홀리 골라이틀리(Holly Golightly).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이다. 새벽부터 이토록 우아한 블랙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하다니! 이 영화 덕분에 휴버트 드 기븐치(Hubert de Givenchy)가 디자인하고 오드리 헵번이 입은 스몰 블랙 드레스의 잉크 블랙 컬러는 세련미와 시크한 멋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 2016년 4월 팝스타 프린스(Prince)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충격을 받은 팬들은 그의 시그니처 컬러인 보라색 옷을 입고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모여들었다. 팬들은 그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프린스의 삶을 기렸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인터뷰에서 열여덟 살 때부터 프린스의 팬이라고 밝힌 길버트 아라곤(Gilbert Aragon)은 보라색 모피 조끼와 가죽 장갑을 착용하고 “이는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냉소적이고 시크한 성격의 패션 잡지사 편집장 미란다는 앤디가 입은 꽈배기 무늬 스웨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앤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그 스웨터 색상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란다. 그렇다고 청록색도 아니지. 물론 짙은 남색 계열의 라피즈(lapis) 색도 아니고. 그건 세룰리언(Cerulean)이라고 부르는 색이란다.” 그러면서 미란다는 세룰리언 블루 컬러의 옷이 백화점과 할인매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유행시킨 여러 디자이너 컬렉션을 나열하면서 “사실 그 색은 매우 세련된 색이다. 우리 같은 패션 종사자들이 고심해서 고른 색상의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도 정작 너는 패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다니 참으로 재밌구나.”라고 덧붙였다.
* 녹색은 섹슈얼리티부터 판타지, 악마의 유혹과 독성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화려하지만 위험과 유혹을 암시하거나 생명과 죽음의 양면성이 있다. 어두운 톤의 오드닐[eau de Nil-암녹색] 새틴과 에메랄드 벨벳의 양극을 떠올려보면 안다. 그러나 녹색이 가진 강력한 연상 효과 중 하나는 역시 자연, 건강, 숲, 정원의 푸르름이다. 박물학자 존 뮤어(John Muir)는 “녹색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숲속의 자연은 모든 고통을 치유하고 진정시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녹색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 영혼의 치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의 머스타드 옐로 주름치마를 입은 비욘세가 야구 방망이를 들고 맨발로 거리를 나선다. 바람을 피운 파트너를 향한 복수심에 불탄 그녀는 자동차와 상점의 유리창을 마구 부수고 다닌다. 드라마 [레모네이드]의 뮤직비디오 [홀드업(Hold Up)]에 등장한 이 장면에서 노란색은 그녀의 긍정적 태도를 나타냄과 동시에 화면 속에서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비욘세의 노란색 원피스는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색조인 노란색의 패션계 귀환을 촉발했으며, 주로 행복한 감정과 연결되던 노란색에 반전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 영화 [007 어나더데이]의 본드 걸 할리 베리는 주황색 비키니를 입고 바닷가에 등장한다. 이 덕분에 종종 악의적인 색상으로 여겨졌던 주황색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에레스(Eres) 브랜드가 제작한 칼 장식 벨트의 주황색 비키니는 최초의 본드 걸 허니 라이더(Honey Ryder) 역을 맡은 우슬라 안드레스(Ursula Andress)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 오렌지색 비키니를 입은 할리 베리의 모습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퍼지면서 오렌지색은 결코 외면될 수 없는 색이 되었다.
* 갈색은 자연의 색이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인테리어, 가죽과 스웨이드의 자연스러운 톤, 황금빛과 고사리와 같은 여러 들풀에서 자연스레 드러난다. 또한 다양한 색조로 짜인 스코틀랜드의 전통 트위드 재킷의 편안함에 이르기까지 흙빛은 따뜻함과 고독감을 자아낸다. 물론 그것은 혼탁한 색일 수도 있다. 데릭 자먼(Derek Jarman)의 컬러에 관한 책 『크로마 Chroma』에는 “갈색에 단색 파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갈색은 일종의 어두운 노란색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을 섞으면 베이지, 회갈색, 황갈색, 밤색, 녹색은 물론 밤, 코코아, 커피, 모카, 라떼, 토피, 카라멜 등 유혹적이고 편안한 이름의 다양한 색상이 생성된다. 모든 갈색 색조는 중립적이어서 더 대담하거나 밝은 색을 돋보이게 한다. 녹색이나 오렌지와 결합하면 완전한 자연의 느낌을 전달하며 신뢰감을 준다.
* 영화 [제저벨]의 주인공 줄리 마스든(Julie Marsden)은 뉴올리언스의 성질 고약한 미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미혼 여성은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올림푸스 무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당시 관행을 깨고 반짝이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눈총을 받는다. 그리고 약혼자 프레스(Pres)에게 파혼당한다. 성경에서 붉은 망토를 입고 붉은 짐승을 탄 바빌론의 창녀 같은 존재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후 그녀는 전염성 강한 황열병 환자 집단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던 전 약혼자 프레스를 돌보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시 인정받는다.
* 패션계의 초현실주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쇼킹 핑크’에서부터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밀레니얼 핑크까지, 여성스러운 것과 가장 관련이 깊은 분홍색은 수많은 정체성을 거쳤다. 1950년경에는 금발의 섹시한 미녀 제인 맨스필드와 마릴린 먼로의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조했고, 18세기 패션계 남성들 사이에서는 젊은 활력의 지표로 작용했다. 패션 역사학자 발레리 스틸(Valerie Steele)은 “분홍색은 예쁘고, 달콤하고,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속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인위적인 색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1995년 휴 그랜트(Hugh Grant)가 할리우드 대로에서 매춘부에게 집적거리는 모습이 전 세계로 퍼지자 파파라치들은 당시 그의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 헐리의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흰 청바지, 흰색 스트래피 샌들, 은색 상의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사진작가와 인사를 나누던 그녀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였다. 이토록 청순한 화이트 복장은 파트너의 추문에도 냉정을 유지하는 당당함으로 비춰졌다. 또한 가장 까다로운 화이트 색상의 청바지를 멋지게 소화해낼 정도로 자신감 충만하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화이트 진은 그녀의 의상에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