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는 가진 게 너무 없잖아. 아버지가 집도 안 사놓고 쓰러져버렸잖아. 그나마 있는 돈도 병원비로 다 까먹었잖아. 엄마는 종일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어미 귀신 같은 몰골로 살고, 나도 종일 일하느라 새끼 귀신 같은 몰골로 살았잖아. 우리가 귀신이었잖아. 그치? 근데 엄마, 이게 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래. 내가 이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게 당연한 거래. 청약 적금까지 해약하고, 집도 없이, 노후 대비도 전혀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갚아야 할 돈만 생각하며 기계처럼 일하는 게 당연한 거래.
---「엄마를 절에 버리러」중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빚을 갚다가 모든 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가족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역에 내렸고, 난생처음 동작대교를 걸으며 나에게 가족을 버릴 만한 결단력이 있는지 고심했다. 우리가 가족으로 맺어져 있는 게 슬프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더라도 부모와 전혀 모르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서로를 아예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가족으로 만나, 이번엔 돈이 아주 많은 가족으로 만나 서로에게 든든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돈이 많으면 그런 가족이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절에 버리러」중에서
어쩌면 엄마의 인생이 그런지도 모른다. 천 원짜리만 간간이 당첨되는 인생. 새 스크래치 복권을 받아서 이번엔 당첨될지도 모른다고 간절하게 소원하는 인생. 그런 인생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다. 끝까지. 당첨 없이 소원만 비는 인생이 끝까지. 엄마가 내 이름을 김소원이라고 지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이려나. 소망을 담아서 간절하게 뭔가를 바란 것이려나. 그 소망이 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엄마를 절에 버리러」중에서
엄마와 로맨스라는 단어는 정말 안 어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딸은 어쩐지 불순하다. 그래도 엄마와 모텔도 아니고, 엄마와 로맨스는 그나마 낫지 않나. 엄마는 아버지를 제외하곤 평생 아무하고도 연애를 못 해봤을 거다. 나 역시 로맨스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이제 와서 우리에게 로맨스가 필요할까? 필요 없다. 나는 엄마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나만 있으면 될까. 공원 벤치에 앉아서 바람 부는 운동장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엔 무엇이 가득 차 있을까. 그리움이나 외로움이라면, 그래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암 늑대 김수련의 사랑」중에서
너 비둘기 싫어하지 마. 물 먹는 친구를 기다려 주는 걸 보니 인간과 다를 바가 없네.
그럼 엄마도 쥐 싫어하지 마. 쥐도 기다려줄지 모르잖아. 바퀴벌레도 싫어하지 마. 바퀴도 기다려줄지 모르잖아.
바퀴는 안 기다려줄걸.
모르지.
징그럽다. 바퀴도 친구를 기다려주면 어쩌니.
미워할 게 없네.
우리는 동시에 서글프게 웃었다.
---「암 늑대 김수련의 사랑」중에서
제가 이 서류들이 왜 필요하냐면요, 선생님, 이런 형편에 제가 더 살아서 뭐 하겠어요. 애들한테 짐만 되지. 근데 제가 지금 겨우 예순넷이에요. 요즘엔 수명이 길어져서 100세까지 산다면서요.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건데, 우리 애들이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요. 생각해보세요, 선생님. 그 애들이 일흔이 되어 서도 저를 부양해야 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 애들이 지금 저보다 더 나이 많은 노인이 되더라도 저를 부양해야 한다고요. 그래서요 선생님, 저는 꼭 장애인이 되고 싶어요. 정신장애인이요. 장애인이 되면 정부에서 혜택을 많이 준다면서요. 그러려면 그 서류들이 꼭 필요해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중에서
서한지는 공항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며 가이드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그건 뭐였을까. 경멸도 아니고 무시도 아닌 그것은. 존중으로 포장된 업신여김을 느꼈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시간이 한참 흘러 서한지는 직장 동료 이오선이 확진자 남편과 두 마리의 반려견을 집에 두고 나와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 예전에 보았던 에어비앤비 숙소를 선뜻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동유럽 패키지여행의 가이드가 보였던 태도가 이해되었다.
---「있잖아요 비밀이에요」중에서
김월희는 곧 월셋집으로 이사할 것이고, 서한지는 이오선을 골탕 먹일 궁리를 하다가 제풀에 지쳐 포기할 것이고, 차기훈은 여전히 얼굴을 모르는 민해연에게 업무 지시를 내릴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주말. 확진자 폭증. 날씨는 점점 따듯해지다가 더워지고, 그들은 한여름에 미지근한 소주를 마시면서 소주가 언제 이렇게 독해졌지, 하고 말하며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할 것이다. 그거면 된 것일까. 서한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월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벌레 같지 않고, 아무리 봐도 사람 같은 엄마의 얼굴을.
---「있잖아요 비밀이에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