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음악을 듣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느린 악장 들만 모아서 들어 보는 것이죠. 차근차근 순서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천천히 흐르는 멜로디’들만 찾아서 감상해 보곤 합니다. 빠르고 격렬한 악장보다도 때론 느린 악장에 담긴 조용한 섬세함이 작곡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닐는지 생각되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2악장은 연주자가 테크닉 그 이상을 뛰어넘어 잘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페이지기도 하지요.
제가 가장 즐겨 듣는 느린 악장의 작품들을 소개하자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No. 8 op. 13 : 비창〉 2악장,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op.21〉 2악장,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No. 16 K.545〉 2악장, 〈드보르작 교향곡 9번 op. 95 : 신세계로부터〉 2악장,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op. 74〉 2악장들이에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2악장들이기도 하고 그만큼 제대로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도 하지요. 느리지만 감성이 풍부하게. 깊이 있게. 아름답게. 그 안에는 음악성과 표현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무척 중요하고 심오한 음악적 디렉션이 담겨 있어요.
이상하게도 저는 언제나 느린 악장을 연주할 때가 훨씬 마음이 편안했어요. 빠른 악장들이 불편했던 이유를 손이 멋지게 돌아가지 않는 부족한 테크닉 탓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느린 악장의 음표들을 읽을 때면 비로소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죠. 온전히 음악 안에 머물러서 작곡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제게 늘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무서운 전쟁터였고 내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 가야 하는 현장이었는데 2악장의 세계가 시작되는 동안만큼은 그런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죠. 2악장의 느린 음악들에는 나를 내려두고 쉬어 가게 해 주는 신비가 있어요. 요즘은 순간순간 운동 선생님이 얘기해 준 숨 쉬는 법을 생각하며 제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에 시간을 두고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려 해요. 잠시 눈을 감고 느리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생각을 정돈하려 하죠. 그것은 매우 어렵지만 인내하고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나만의 2악장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보세요. 한 음반에 작품들이 다 들어 있지도, 이어지지도 않아서 매번 오디오에 다가가 느린 악장을 선택하기 위해 CD를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나를 천천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음악에 마음을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거예요. 마음 편안히 산다는 것은 내면이 원하는 진정한 템포를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_ 2악장이 시작되는 시간을 메모했습니다. 2악장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들어 보세요.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No. 8 op. 13 비창〉 2악장(백건우, 8:40부터)
·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op. 21〉 2악장(아르투르 루빈슈타인, 14:25부터)
·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No. 16 K. 545〉 2악장(선우예권)
· 드보르작의 〈드보르작 교향곡 9번 : 신세계로부터 op. 95〉 2악장(베를린 필하모닉)
--- pp.67~68
요요마는 관대함을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관계의 확장으로 이어 가고 있어요. 탱고와의 만남, 영화 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와의 음악 작업 그리고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이 있습니다.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은 규모가 크고 가장 특이한 작업이라 할 수 있어요. ‘실크로드’, 곧 예전 동서양의 무역 길이 되어 주었던 그 길의 명칭을 따 세계의 끝과 끝이 만나는 거대한 앙상블을 만든 것이지요.
실크로드 앙상블에서는 전 세계의 모든 악기와 음악들이 다 조화를 이루며 연주가 될 수 있어요. 국적이 다른 연주자들, 처음 보는 악기, 새로운 소리, 클래식, 팝, 민요, 세계의 모든 노래와 그들이 만든 새로운 선율이 실크로드 앙상블에서 멋진 음악으로 재탄생하죠. 어떻게 저렇게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과 악기들이 모였는데 이와 같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것이 실크로드 앙상블 중심에 있는 요요마가 가진 힘이고 관대함이겠죠.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듯이 이 모든 아이디어를 ‘피자 가게’에서 얻기도 했다는 사실이에요. 그에게 일상이란 창조적 아이디어의 연속인 것이지요. 둥근 피자와 여러 가지 재료가 조화를 이룬 도우를 보며 영감을 얻은 앙상블의 연주.
인생의 사소한 걱정들, 가까운 사람과의 오해들, 운전을 하며 버럭 화가 날 때, 별것 아닌 일에 우울해질 때, 내 맘을 몰라줄 때. 그럴 때마다 항상 요요마를 떠올려 봐요. 해맑게 웃고 있는 그의 미소를.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그토록 애쓰는데 나는 이 좁은 공간에 나를 가두어 두고 왜 이토록 시시하게 살아가는가?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진 못할지언정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수는 없을까? 뭐 아무리 생각하고 다짐해 봐도 잘 안 될 거예요. 잠깐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가도 전혀 관대하지 못하게 행동하겠죠. 그런데 예술이란 참 신기해요. 적어도 예술 안에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짧은 순간일지라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넉넉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시시하게 살고 싶어지지 않아요.
언젠가 제게도 그런 경지가 올까요? 피자 대신 비빔밥에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요?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요요마의 예술 정신을 떠올릴 수 있는 마음 말이죠. 예술은 생각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이미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_ 실크로드 앙상블의 연주를 들어 보세요.
·Heart and Soul ·Going Home
--- pp.93~94
안타깝게도 그런 순간마다 가장 중요했던 제 자신의 목소리는 무시되었죠. 가장 먼저 귀 기울여야 했던 목소리에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거울 속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피곤함에 찌든 얼굴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신없고 분주하게 지나는 날들은 쌓이지 않고 모래알처럼 다 흩어져 버리는 기분이었지요.
그랬던 저의 내면을 그대로 악보에 담은 듯한 음악이 있습니다. 바로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 거울 속의 거울〉이란 음악입니다. 명상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 곡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선율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반복되는 간결한 선율 속에 우리의 현실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과 고통이 담겨 있지요. 그의 슬픔과 고통은 소리를 지르고 꺼억꺼억 울며 표현하지 않습니다. 내면으로 삭이고 삭이고 집어넣고 차마 슬픔을 꺼내어 보지도 못하는 마음이지요. 꺼내지 못했던 그것을 마주할 기회를 비로소 음악을 통해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보기 싫었던 깊숙한 내면의 세계를 아르보 패르트는 보아야 한다 말하고 있지요. 〈거울 속의 거울〉이란 연주곡은 가만히 내 자신을 직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침내 용기 내어 직면했을 때의 감정은 결코 두렵거나 무섭거나 절망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 안에서 마주한 나의 어두운 내면은 기꺼이 내가 따뜻하고 다정하게 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 합니다. 음악이란 공간은 안전하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도 괜찮다 허락합니다.
저는 요즘 빈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로 가득합니다. 놓아 버리면 아쉽고 바보 같은 포기일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반대로 잘한 선택이다 여겨집니다. 당연히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선택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와 아쉬운 선택을 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는 분명히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있었지만, 인생은 결코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지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을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빈 마음을 가지는 순간 그 모든 아쉬움을 긍정할 기회, 그리고 인생에 있어 뜻밖의 문을 다시 열어 줍니다. 조용히 공터가 생긴 인생에서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묵상합니다.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빈 마음을 그저 가만히 품어 봅니다.
_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 거울 속의 거울〉 연주와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나 보세요.
--- pp.159~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