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힙합을 통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 또 그 세계에 공감했듯이, 독자들도 이 책이 다룬 힙합 곡들과 그 곡이 펼치는 세계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음악을 들어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쓴 글과 글에 다뤄진 음악 사이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사유를 끌어낼 수 있다면, 글쓴이로서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가닿아 그런 방식으로 더욱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프롤로그」중에서
인간이 자기 기억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생각해낸 가장 인간적인 시도는 어쩌면 예술일지 모른다. 죽음을 앞둔 예술가라면 일생을 회고할 때 어떤 작품은 남기고, 어떤 작품은 불태우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한 뒤에는 자신이 남겨놓은 작품으로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빈지노의 ‘If I Die Tomorrow’는 바로 그런 기억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남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홀로 깨어 있다. 며칠째 첨삭해서 종이 위에 삐뚤빼뚤 쓰인 가사에 또 두 줄을 긋는다. 삭아버린 이어피스를 귀에 걸치고 마이크에 랩을 녹음하는 젊은 예술가는 온전히 창작에 몰두한다. 비트와 드럼이 깨워내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삶이라는 캔버스, 빈지노 - If I Die Tomorrow」중에서
여기 민호라는 아이가 있다. 아빠를 잃은 게 실감 나지 않는다. 꿈만 같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이는 아파트 계단 앞에 엎드려 슬픔을 삼키고 있다. 땅이 푹 꺼지는 것 같다. 친구들이 아파트 계단 앞까지 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힘내란 말도 힘없이 아이 앞에 떨어지고 만다. 친구들은 모두 그대로인데 자신만 달라져버린 느낌. 친구들이 마냥 고맙기에는 아이의 마음은 너무 복잡하다.
‘The Anecdote’의 도입부다. anecdote라는 단어는 ‘출판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현대에는 일화, 개인적 진술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 노래 또한 화자가 아빠를 잃은 이후 일어난 감정과 부재의 흔적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감정을 토로하지 않고도 “푹 꺼지던 땅”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슬픔이 스스로 감당하기에 얼마나 무거운 감정인지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이 노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표현들 때문이다.
---「아빠와 술 한잔하고 싶어, 이센스 - The Anecdote」중에서
더 콰이엇의 ‘한강 gang megamix’을 들으면 여의도 빌딩 모서리에 걸린 햇빛과 한강의 물결에 반사된 햇빛이 동시에 잔디밭에 둘러앉은 이들의 등을 달구는 풍경이 떠오른다. 너무 강한 빛이 이들의 실루엣을 침범해 번져 나오지만, 아랑곳없이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서로 잔을 부딪치거나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가벼이 흔들린다. 이 환하기만 한 장면은 영원할 것 같다. 그들을 감싸는 건 햇빛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우정이다. 물론 영원한 건 없겠지만, 이 순간이 기억 속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예감 또한 찬란하다.
---「한강에서 반짝이는 꿈의 윤슬, 더 콰이엇 - 한강 gang megamix」중에서
던말릭의 화자는 타인의 기준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법을 익혔고, 영수증을 통해 도시와 나의 욕망을 성찰한다. 반면 우원재는 모순적인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법을 익혔다. 그는 친구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하며 도시 생활의 압박감을 해소한다. 던말릭과 우원재가 서울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한 전략은 비슷한 듯 다르다. 서울에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과 비교해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도시에서의 삶의 조건을 인정하며 자기와 도시의 괴리가 빚어내는 모순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PAID IN SOUL, 던말릭 - Paid in seoul」중에서
“누구나 삶을 연기한다” pH-1의 ‘DRESSING ROOM’을 듣고 떠오른 말이다. 가사에도 “my life's a big drama[내 삶은 한 편의 큰 드라마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실 흔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클리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의 차원에서든 의식의 차원에서든 그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연기하는 삶이 진짜 삶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자신의 삶이 가짜라는 화자의 각성은 연기하는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다시 삶을 연기하기 위하여, pH-1 - DRESSING ROOM」중에서
2022년 내 플레이리스트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힙합 앨범은 pH-1의 〈BUT FOR NOW LEAVE ME ALONE〉이다. pH-1은 나에게 힙합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습관을 만들어준 래퍼다. 혹자는 pH-1의 음악에서 특별한 힙합적 매력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센스의 〈이방인〉이나, 씨잼의 〈걘〉 같은 앨범을 가벼운 마음으로 매일 반복해서 듣기란 상당히 힘들다는 측면에서 pH-1 음악의 고유한 매력과 포지션은 분명 존재한다. 매일같이 재생되는 일상의 BGM으로 그의 음악은 유효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런 대중성으로 인해 pH-1의 음악을 지금 쏟아져 나오는 힙합 앨범들의 대중적 설득력과 완성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팝과 힙합의 교집합, pH-1 2집 〈BUT FOR NOW LEAVE ME ALONE〉」중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세상은 변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옛날 SF 영화에서 보았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살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드디어 엔데믹이 찾아왔으나 우리는 아직도 이 삶에 적응 중이다. 이 혼란은 그 전의 삶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낯선 삶에 대한 내적 저항 사이에서 벌어진다. 이후의 세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했던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면 절망적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팬데믹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우원재 - 우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