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자기모순을 일으키며 느낄 수 있는 모든 통점을 자극한다. 고독은 내가 함부로 길들이거나 달랠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 내 몸에 박힌 고독의 이빨 자국을 세어보며 살아갈 날들의 용기를 잃어갈 때마다 나는 몸부림을 치는 대신 고독을 천천히 이해해보고 싶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거나 스스로 굴복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내 생활의 밑천이기도 하다.”
--- p.15-16, 「고독의 몸부림」 중에서
“오래된 문장마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야기가 맺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신기하게도 아무런 다짐 없이 잘 살고 싶어진다. 예전과는 다소 달라진 생각과 취향을 발견할 때에도 좋았다. 스스로 변함없다고 착각하는 나를 자주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문장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경험은 은근히 흔하지 않다. 생활에 부대끼거나 몸살을 앓으며 겨우내 쓴 몇 줄의 문장이 오늘에서야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은 일기의 기막힌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 p.20-21, 「일기 쓰기의 부끄러움」 중에서
“물건에 치여서 혹은 새것에 눈이 멀어서 모자람을 잠깐이라도 잊게 되는 시간이 지나면, 숨겨왔던 모자란 부분이 다시 벌어지곤 했다. 그럴 땐 많이 먹었다. 배고픔 없이 음식 앞에서 고꾸라졌다. 고장 난 로봇처럼 음식을 씹고 소화제를 먹거나 변기를 붙잡고 넘치는 것을 게워냈다. 채울수록 허전해지는 일은 내 생활에서 가장 오래된 멀미이기도 하다.”
--- p.30-31, 「헛헛한 마음을 위한 소비」 중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산수유를 보면서 봄이 왔구나, 하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봄이라고 생각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밀려드는 따뜻한 파도를 꼼지락거리며 여름이라 하였고, 단풍놀이에 다녀온 엄마의 사진을 전해받았을 땐 늦게나마 가을을, 학교 가는 아이의 옷소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민트색 내복을 보면 기나긴 혹한기를 예감했다. 사계절의 트랙을 뛰는 흰 운동화도 때에 맞게 발을 굴렀고, 모두가 땀 흘리기에 좋은 계절이 있었다.”
--- p.41, 「계절 실책」 중에서
“제철 과일의 싱그러움 같은 것을 동경했다. 퍽퍽하고 무료한 삶에 과일 한 접시를 먹는다는 것, 특히 제철 과일을 먹으며 어떤 한때를 오롯하게 당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 p.76, 「딸기 집착」 중에서
“이 글을 통해 아주 오랜만에 포말이라는 단어를 썼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단어였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그 단어를 잊은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나를 잊었다는 느낌이 든다. 빠져 죽는 상상보다 말라 죽는 상상에 더 가까워진 내 어항에 담긴 바다를, 나의 얕은 수심과 슬픔을 기어코 바다는 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바다에 대해 그만 말하기로 한다.”
--- p.134, 「바다에 대한 설명」 중에서
“내 생활 반경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실패들을 헤아리던 이 목록은 내 파편의 반짝거림을 찾아내는 기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땐 열렬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들이다. 훗날에 다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며, 머지않아 철회해야 할 목록들도 있겠지만. 이토록 서로 같은 모양 없이 깨져버린 실패의 목록이, 나를 어떻게 이루고 있었는지를 본다.”
--- p.166, 「깨지지 않기로 한 약속」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