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간의 장례식 기간 내내, 태웅은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울지 않고 버텼다.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강해져야 해. 아빠처럼 남자답고, 힘센 사람이 되어야 해.’
그날부터 태웅은 태권도 학원을 더 열심히 다녔다. 키가 크려고 우유도 많이 마시고, 싫어하던 멸치와 시금치도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태웅의 키는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부터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봄까지 삼 년간 고작 3센티미터가 컸을 뿐이다. 주변 친구들이 머리 하나쯤 더 커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상했다.
--- p.14
최민석은 자신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낙인찍은 애들에게 챌린지를 시켰다. 반 여자애들을 상대로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한 뒤에, 그걸 휴대폰으로 찍어서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는 거였다. 때로는 여자애들 몰카를 찍어 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괴롭힘을 당한 아이를 협박했다.
“지금은 얼굴 가리고 올렸지만, 원본 나한테 있는 거 알지? 선생님한테 이르기만 해 봐. 네 얼굴 나오게 올릴 거야. 그럼 너 몰카범으로 경찰에 잡혀갈걸?”
괴롭힘 당하는 아이도, 챌린지 대상이 된 아이도 최민석의 교묘한 덫에 걸려 괴로워했다.
--- pp.17~18
“그런 거 아냐. 나, 진짜 대한민국에서 왔어. 조선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가 않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또 거짓말.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없대도.”
여자아이의 시선이 태웅이 꺼내 놓은 물건에 가 닿았다. 여자아이의 입술 모양이 슬그머니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지도를 집었다.
“어머나!”
지도를 펼치면서 여자아이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정교한 지도는 처음 봐. 쓰인 지명이 내가 보던 것과 좀 다르기도 하고. 그래, 네 말대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을 수도 있겠어. 내가 전 세계의 나라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니까."
--- p.41
“도령이 실을 사려고? 왜? 수라도 놓게?”
“이 사람도 참. 사내가 무슨 수를 놔! 남자답지 못하게!”
봇짐장수들이 껄껄 웃었다. 봇짐장수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태웅의 얼굴은 점점 더 새빨개졌다.
‘조선 시대에도 남자가 뜨개질하는 건 이상한 일인가 봐.’
얼굴로 피가 모두 몰린 듯했다. 창피한 기억이 태웅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게 어때서?”
점주의 한마디에 봇짐장수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 p.82
“나는 내가 이해가 안 돼. 자기가 원해서 치마를 입는 남자들도 있어.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나는 고작 치마 입은 걸로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건지 모르겠어. 내가 너무 한심해.”
태웅은 고개를 푹 숙였다. 금원이 태웅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무슨 소리야. 자기가 좋아서 입는 거랑, 남이 억지로 입히는 거랑 같아? 태웅이 넌 치마를 입어서 충격을 받은 게 아냐. 폭력에 진 것 같아서, 그게 화가 난 거지.”
폭력에 졌다. 태웅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도저히 풀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의 답을 알아냈을 때처럼.
--- p.106
“너 진짜 미래에서 왔든지 달에서 왔든지 해야겠다. 어떻게 김삿갓을 모를 수가 있어? 방랑시인 김삿갓! 급제를 했는데도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고 전국을 떠돌면서 시를 짓는 사람이야. 권력자를 비판하는 통쾌한 시를 짓는 걸로도 유명해. 나 김삿갓 시 정말 좋아하거든. 김삿갓의 시라고 알려진 건 다 읽었어. 어제 주막에서 본 그 시 짓는 솜씨! 그걸 보면 분명해.”
김삿갓 이야기를 하는 금원의 목소리가 점점 열의에 차올랐다.
‘어제 삿갓 아저씨가 시를 읊을 때 좋아하는 연예인 보는 것처럼 봤던 게 착각이 아니구나.’
태웅은 금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삿갓이 준 금속판을 살펴보았다.
‘이게 뭘까?’
--- pp.134~135
“우리 약속하자.”
금원은 태웅의 눈을 응시하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우리, 우리답게 살자. 남자답게, 여자답게, 그런 말에 묶이지 말고, 뭘 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또 누가 그런 말로 너를 괴롭히면 나를 기억해. 알았지?”
“뭐야, 다시 못 만날 것처럼.”
--- p.169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원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고, 타임 슬립 같은 건 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웅은 마주 잡았던 손의 온기와 금원과 함께했던 모험, 금원이 건넸던 말들 모두를 없던 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금원을 만나는 게 내 소원이었던 거야. 금원처럼, 내게 용기를 주는 사람을.’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