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뭔가가 틀어지면 견디기 힘들 뿐 아니라 잠시도 그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엄청난 재앙이 닥친 것처럼 불안감이 점점 부풀어 오르다 급기야는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비정상에 관하여」중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건 ‘불행의 씨앗’을 몸속에 품고 사는 것과 같다. 하루 종일 더러운 구정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복하게 사는 법도, 희망을 품는 것도, 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도 내 것은 아니었다. 하루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정상에 관하여」중에서
하루치의 기쁨, 하루치의 시련, 그렇게 살아야 중심을 잃지 않고 흩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어차피 인간은 딱 하루치씩밖에 못 사는 거라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꿈꾸며 일상을 쥐어짜다 보면 하루가 무너져 버린다고 했다. 강하다는 건 어쩌면 하루치만큼 중심을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정상에 관하여」중에서
추모의 시간을 마친 다음, 벽면에 있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고양이가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회색 시멘트 바닥으로 된 한 평 남짓 화장로 위에 작은 관이 놓이고 철문이 굳게 닫혔다. 저 고양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늙은 고양이었으면 좋겠다고 달수는 생각했다.
---「죽은 고양이를 태우다」중에서
차창 밖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대봉동 산동네가 보였다. 피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살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값비싼 고층 아파트가 새살처럼 돋아날 거였다. 달수는 봉구에게 호두나무 상자를 넘겨주며,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고 나면 어디 조용한 바닷가에라도 가서 고양이의 뼛가루를 뿌려 주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고양이를 태우다」중에서
그는 번호를 찍어 달라며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슬픈 표정으로 건네는 위로 따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다가와 어이없게도 나를 웃겨 준 사람, 춘배는 내게 그런 남자였다.
---「내 애인 이춘배」중에서
씨발, 겁이 나. 나 닮은 애가 나올까 봐.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사람들한테 무시나 당하면…… 운전 면허증도 없는 아빠 밑에서 애가 제대로 크겠냐. 내가……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지 넌 모른다. 울 아버지 죽으면 친구들 불러다 관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쪽팔리게 한 명밖에 없다 나는. 병신 같은 소리나 맨날 듣고 너는 애 앞에서 나를 개무시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아빠가 되면…… 애는 진짜 예뻐해 줄 자신 있다. 공부 좀 못 하고 친구가 하나밖에 없어도 병신 소리 같은 건 절대 절대 입에도 올리지 않을 거고 나는…….
---「내 애인 이춘배」중에서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잖아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어떤 간절한 기운으로 인해 끌려 들어가는 블랙홀 같은 세상이 있어요. 말하자면 ‘지니서점’은 그런 곳이죠. 저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지만 조금 특별한 보험을 함께 팔고 있어요. 진주 씨 어머니가 가입하신 ‘드림 생명보험’도 그런 상품 중에 하나고요.
---「샤넬 No.5」중에서
만약 내게도 꿈이 있었다면 어디쯤에서 그걸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없던 거였나. 아버지가 죽고 엄마와 나, 둘만 남겨진 뒤로는 먹고사는 게 급급해 꿈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엄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뒤로는 복권에 당첨되는 게 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샤넬 No.5」중에서
휴대폰 소리에 잠이 깬 그가 노트북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에게 “잘되고 있지?”라고 물었다. “물론 잘되고 있지!”라며 웃어 주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공과금과 월세를 내고 우리가 함께 치킨이나 감자탕을 사 먹을 수 있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되고 있는 거다. 선배 말처럼, 돈벌이에 이유 따윈 필요 없었다.
---「소설 속의 인물」중에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어머니’였다. 오뎅볶음이나 콩나물무침 같은 반찬을 질리도록 해 줬다는 어머니. 된장찌개를 한 솥 끓여 냉장고에 넣어 두고 곰탕 우리듯 먹였다는 그녀는 내 소설 속에서 자궁암에 걸렸다. 그리고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 아들을 용서받게 만들어야 할 인물이다. 암에 걸린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돈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사장에게 달려들어 홧김에 주먹을 휘둘렀다. 감방에 처넣겠다고 노발대발하고 있는 사장 앞에 또 한 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자를 경찰서 밖으로 꺼내 오기 위해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싹싹 빌고 있다
---「소설 속의 인물」중에서
온실 속에서도 꽃은 죽고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바닥에서도 꽃은 산다. 죽지 않고 살 방법에 대해 최선을 다해 알려 주었지만 결국 죽어 버렸다. 그러니 언니에게 빚진 슬픔 따위는 없다. 사람들 눈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슬픔을 뿌려 주고 깨끗하게 잊어버리면 된다.
---「케잌 상자」중에서
그 순간 언니는, 우리가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 너무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혈관이 팡팡 터진 거야. 불꽃놀이 하는 아이처럼, 언니는 신이 나서 그렇게 죽은 거라고. 이제 이해되지 여보.
---「케잌 상자」중에서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처음 보고 온 날이었다. 아기의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돌아오던 길에 갑자기 그게 너무 먹고 싶었다. 엄마가 가끔 해 주던 달큰한 무 생선조림. 그래서 한 팩에 4천 원 하는 싱싱한 방어 대가리를 사 와 반으로 가르고 큼지막하게 썬 무에다 설탕과 간장, 다진 마늘을 듬뿍 넣은 양념에 졸여 먹었다. 배 속에서 엄마가 생선 대가리를 쪽쪽 빨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오물거렸을 아이는, 그 일이 터지고 얼마 안 있어 생선 뼈처럼 버려졌다. 무능한 남편, 잡히지 않는 사기꾼들, 비어 버린 통장……. 심장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가난한 엄마가 자식을 낳는 게 더 나쁜 거라고, 그러니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어 대가리」중에서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너도 나만큼 불행해 보여서, 미움을 잠시 잊었는지도……. 행복했다면 다시 만나지 않았을 우리는, 차가운 모래를 털고 일어나 따듯한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약간의 간격을 유지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방어 대가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