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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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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6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480쪽 | 630g | 152*225*25mm
ISBN13 9791164845644
ISBN10 116484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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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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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년(우왕 9) 가을 정도전은 함주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았다. 이성계는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세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1380년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전라도 지리산 일대 운봉 지역에서 섬멸한 황산대첩은 그의 명성을 보다 높인 사건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휘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던졌다고 한다. 이성계가 재차 무슨 일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이 순간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사력에서 혁명의 성공을 보았을 것 같다. 결국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정도전의 ‘문文’과 이성계의 ‘무武’가 조화되면서 새로운 혁명의 길로 가는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정도전, 혁명가에서 왕조의 설계자로」중에서

특히 장영실의 아버지가 중국의 항주 사람이고 어머니가 신분이 천한 동래현의 관기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 장영실을 발탁해서 힘을 실어준 세종의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다. (……) 세종은 장영실에 대해,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하여 장영실이 실질적으로 세종의 참모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장영실의 당시 임무는 가마의 제작 감독이었다.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졌는데,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을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했고, 장영실은 곤장까지 맞아야 했다. 1442년 대호군 직책에서 파면된 이후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때는 세종에게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의 갑작스러운 해임과 처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투성이다. 일설에는 장영실의 과학적 재능을 견제한 명나라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한 세종의 배려라는 해석도 나오지만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천문 과학 기구 프로젝트가 끝나고 세종이 다른 사업에 역점을 두면서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세종의 믿음에 보답한 과학자, 장영실」중에서

예방승지는 성삼문에게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는 직책이었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의 압박 속에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던 날 성삼문은 바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인 예방승지의 직책에 있었던 것이다. 훗날 죽음으로 대항한 상대에게 옥새를 주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은 성삼문의 기구한 운명으로밖에 풀이할 수 없을 것 같다. 《연려실기술》은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하여 감히 한 마디도 내지 못하였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안고 목 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성삼문, 죽음으로 단종을 지키다」중에서

성삼문과 신숙주는 사후에도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성삼문이 충신의 대명사로 현재까지 추앙을 받은 반면, 신숙주는 뛰어난 학문적 자질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변절한 지식인이라는 꼬리표가 늘상 따라다니고 있다. 원래 녹두의 싹을 내어 먹는 나물로서, 두아채豆芽菜란 이름으로 불렸던 나물이 조선 후기 이후 ‘숙주나물’로 바뀐 것에도 신숙주의 행적을 응징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증오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만두 속을 만들 때 이 나물을 짓이기기 때문에 신숙주에 대한 분노를 풀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 변절한 지식인 vs 정치·문화 정비의 주역」중에서

1506년(연산군 12)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과 잔치를 하다 시 한 수를 읊었다.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며 읊기를 마치자 연산군은 갑자기 눈물을 두어 줄 흘렸다. 다른 여인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으나, 장녹수와 전비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는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두 사람은 앞날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이날은 바로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연산군의 마음을 뒤흔든 시세 참모, 장녹수」중에서

남곤이 자신의 죄악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정황도 나타난다. 남곤은 옥사를 주도한 후에 친척과 후배들에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고 여러 차례 질문을 던졌다. 남곤은 “응당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는 답을 듣고는 하인을 시켜서 평생에 쓴 초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중종 시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져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남곤이 이미 사림을 얽어서 해치고서 스스로 만세 뒤에 죄를 받을 줄을 알고, 자기 문장이 세상에 나오면 거듭 사람들의 치욕을 받으리라 여겨, 죽을 때 자기의 원고를 모두 불살라 없앴으니, 그 죽은 뒤의 계획도 또한 간교하다 하겠다”라고 하여, 남곤이 원고를 스스로 불태운 모습을 더 강하게 비판하였다. (……) 남곤은 마음이 행실과 어긋났다고 스스로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림파 학자들을 어육으로 만들어 놓은 엄청난 결과에 대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곤의 모습이 낯설지 않는 것은 현대 정치권이나 고위공직자 중에도 재주는 넘치지만 그 재주를 부정적인 곳에 쏟는 인물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총애와 권력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그 원고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곤의 사례를 경계로 삼았으면 한다.
---「중종의 대리인 남곤, 영원한 간신으로 기억되다」중에서

이황은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70세 되던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병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 사랑하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고 침상을 정돈했다. 그리고 단정하게 앉은 자세로 숨을 거두었다. 조선성리학 최고 인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실천한 퇴계 이황」중에서

조식은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직선적인 상소문을 올린 것은 이러한 생각에서였다.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대목에 대해서는 명종이 ‘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 역정을 낼 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에 대한 불만이 벽서의 형태로 나타난 경우는 있었지만, 조식처럼 직언하는 상소문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없었다. 조식에 대한 처벌 주장이 제기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이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조식을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 조정의 대신들과 언관,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며 조식을 처벌한다면 왕이 언론을 탄압하는 것이라며 비호하였고, 결국 명종은 조식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식의 상소문 파문은 명종 시대에 재야의 언론까지 수용하는 정치 문화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명종에게 올린 조식의 상소문, 정국을 흔들다」중에서

사야가는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좌임향, 격셜풍)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정벌하러 가게 되면서 그를 선봉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야가는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결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의 선봉장이 되어 출정함에 귀화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그가 조선의 예의와 문물을 사모하여 당호를 ‘모하慕夏’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 장군이 된 김충선」중에서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인조는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고령으로 사양하는 이원익에 대해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부탁했다. 이미 80세가 넘어도 그는 여전히 국가에서 필요로 했던 재상이었다. 1634년 1월 88세를 일기로 이원익은 사망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삶은 소박했다. “금천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의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증언한다.
---「영원한 영의정, 이원익」중에서

김신국의 경제정책은 양전의 철저한 시행으로 농업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바탕에서 국가의 비용을 절감하는 절제와 생산 확대를 통한 국부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이었다. 이것은 화폐유통과 함께 국용을 절제하고, 어업과 염업과 같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국가재정으로 적극 확보하려는 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김신국은 고려 성종 대 이래로 화폐를 사용한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한 후, 외국과는 달리 우리만 쌀이나 옷감으로 유통한다면 백성이 곤궁하고 국가가 가난해진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주식환무지법酒食換貿之法’을 제정하여 배고픈 사람들이 동전을 가지고 시장에서 쉽게 술 마시고 먹을 수 있게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때 동전 사용의 묘미를 알 것이라 하였다. 김신국의 건의는 인조에 의해서 수용되어 그해 11월에 호조의 요청으로 인경궁에 주전청을 설치하고 동전의 주조 사업에 착수하였다. 김신국은 성중에 가게를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동전으로 사고팔게 하는 등 동전 유통의 현실성까지 미리 검토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강화·교동·연백 등 개성을 중심으로 중국 동전이 원활히 유통되고 의주와 안주 등 중국 접경 지역에서도 동전이 유통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전국에 널리 유통되는데, 이러한 유통의 기반에 김신국과 같은 선구적인 관료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국방과 경제 전문가, 김신국」중에서

차가운 겨울 추위 속에 전세도 계속 불리해지자 인조는 마침내 최명길로 하여금 항복을 청하는 국서의 작성을 명했다. 최명길의 국서를 본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 이런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면서 국서를 찢어버리면서 실성통곡을 하였다. 최명길은 “대감이 찢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주워야 한다” 하고, 오랑캐에게 보내는 답서를 주워 모아 붙였다.
---「최명길, 실리론으로 나라를 구하다」중에서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정약용과 부인의 무덤이 있다. 실학박물관도 바로 옆에 조성되어 조선시대 실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다. 생가 쪽을 조금 나와 강변가에 조성된 수변 공원 일대는 정약용이 거닐면서 사색을 하고, 배를 타면서 벗들과 교유했던 곳이다. 2018년은 정약용이 해배된 지 정확히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정약용이 지금 시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가 《목민심서》 등에서 제시한 민생 경제의 어려움과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 하향식 조직 문화 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정조의 참모 정약용, 관료와 실학자 두 길을 걷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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