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나’라는 관찰자가 서 있는 자리를 밝히는 일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해에 내가 머물렀던 도시와 시민들의 상황을 설명하는 건 매우 어렵다. 아마도 세 해 전에 출현한 5·18의 잔해가 거리에 뒹굴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책자들은 5·18을 ‘광주민중항쟁’이라 부르고, 정의로운 시민들과 그 공동체의 위대성을 기념하지만, 당시의 체험자에게 그 일은 떨치기 어려운 악몽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5·18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맹수 떼가 평화로운 도시 하나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사태처럼 괴기스러운 참변이었다.
---「관찰자 시점, 9쪽」중에서
고교 시절의 신영일을 아는 친구들은 다들 “영일이는 그때 날라리”였다고 말한다. 나는 한동안 이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날라리’라는 말은 공부와 담을 쌓은 불량 학생이라는 소리인데, 신영일의 실제 모습은 매우 밝고 다정하며 지적으로 아주 세련돼 있었다. 그 어디에 말썽꾸러기가 숨어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신영일이 광주일고 21회라는 사실은 그런 말을 더욱 믿기 어렵게 만든다. 내 고향 선배 중에도 그 동기생이 있는데, 이 선배가 합격했을 때 그 캄캄한 골짜기에도 희소식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어쩌다 그 마을 주민을 만나면 선배의 근황을 묻기가 일쑤였다. 그토록 이목을 끄는 학교에 들어간 이상 함부로 궤도를 이탈할 권리도 없었다. 온 도민이 그랬으니 광주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의 매력이 ‘날라리’ 이미지 속에서 탄생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장면은 광주일고 1학년 때의 것이다.
---「매혹의 문을 열다, 33쪽」중에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신영일이 아무리 자유분방한 문화를 가졌더라도 그의 첫째 관심은 훌륭한 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독서를 중시하고 비판적 사유를 개진하려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이는 한 인간의 성품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덕목과 자질에 속한다. 당연히 그는 한창 자유를 구가하는 젊은이들의 가요가 금지곡이 되는 현상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중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독재자가 아니다. 여기에 신영일이 겪어야 하는 ‘곤혹과 딜레마’가 있었다.
---「인문대 등나무 벤치 앞에서, 62쪽」중에서
신영일은 훈방으로 풀렸으나 대학 당국으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는 가족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만년 야당을 할 정도로 정치의식이 높았으나 경제 활동에는 그다지 유능하지 않았다. 빈농의 자식으로 가방끈조차 짧았으므로 살림을 일으킬 여력도,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건축 재료 판매업을 했는데, 반은 일용직에 가까운 삶이었다. 이렇게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두고 있는 장남이 정학 처분을 받은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었다. 신영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엄연히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고, 교사에게는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품행과 자질이 엄격하였으므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졸지에 사찰 기관의 요시찰 대상이 되는 것도, 또 학교 당국이 ‘근신 처분’을 내리는 일도 달게 받아들여야 했다.
---「하늘을 날기 전에 상처 입은 새, 87쪽」중에서
실태조사반이 광천동을 떠난 뒤 들불야학은 몹시 스산한 분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태조사 참여자들은 대부분 군대를 마쳤거나 3, 4학년이어서 안정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러나 들불야학은 박기순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이제 신영일, 임낙평 정도가 대기 강학을 이끌고 있었는데, 대기 강학은 아직 신입생 태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여유 있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실태조사반원들을 만날 때마다 존경심이나 인간적인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들불은 꺼지지 않는다, 141쪽」중에서
5·18은 신영일이 염려했던 결말을 따라 암담한 파국으로 치달아 버렸다. 박관현은 생사를 알 수 없고, 윤상원과 박용준은 전사했으며, 들불야학의 형제들, 극단 광대의 선후배들, 그리고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선후배들은 줄줄이 연행되었다. 대학은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지고, 신영일은 길에서 우연히 전남대생을 만날 때마다 혹시라도 후배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폭압과 살상이 휩쓸고 간 거리, 무수한 인명과 재산이 폭력으로 날아가 버린 폐허의 도시에서 신영일은 날마다 우울하고 슬펐다.
---「모란이 지고 나면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243쪽」중에서
그날 새벽 2시, 전용호는 잰걸음으로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을 찾고 있었다. 상황이 긴박하여 잠시도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초저녁부터 뛰어다니며 대책 회의를 알리고, 회의에 참석한 뒤, 뒷수습까지 하고 나서야 병원에 닿았다. 그래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3층 중환자실 계단을 막 오르는 참인데,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을 가득 채웠다. 오메, 돌아가시고 말았구나!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순식간에 병실 문을 열었다. 박관현의 어머니와 누님이 시신을 보듬은 채 통곡하고, 동지 선후배들이 머리를 벽에 찧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도 선배의 시신 곁에 다가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박관현과 함께 총학생회를 이끌던 선배들이 등을 툭툭 쳐서야 병실을 빠져나와 급한 대로 이곳저곳 전화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가을밤을 깨우는 벨 소리와 함께 울먹이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퍼져갔다. “관현 형이 운명하셨습니다.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오시고, 다른 분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광주를 깨우다, 305쪽」중에서
신영일은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보고 싶은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면담을 자청했다. 그리고 호출된 사람에게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전청련을 위해 할 일, 광주를 위해 할 일, 참다운 청년의 미래를 위해 할 일을 일러주었다. 전근을 떠나려고 하는 담임 선생님 같았다. 앞으로 자신이 부재할 세계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까운 후배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다들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난날을 상기하며 회한을 삼키느라 사색이 돼 있었다. 복도에서는 여자 후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죽이며 흐느껴 울었다. 그 힘겨운 중환자실 병상으로 이상걸이 찾아갔을 때는 꽤 혼미한 상태였다. 다급한 마음에 꾸벅 인사를 올리자 그 상황에도 얼굴을 알아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상걸아, 너하고는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해 봐야 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라 슬그머니 얼굴을 들여다보니 아무 표정이 없었다. 무심코 던진 말인가 하고 다시 쳐다보았는데, 눈빛이 너무도 맑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이상걸은 ‘나와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을까?’ 하고 골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바로 그 시각에 신영일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 지상에서, 387~388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