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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세우기

묘비 세우기

정은우 | 창비 | 2023년 05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3건 | 판매지수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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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332g | 128*188*20mm
ISBN13 9788936439033
ISBN10 8936439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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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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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부터 연주에게는 기묘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연주는 주로 컵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반만 먹고 남은 반에는 새 플라스틱 숟가락을 꽂아두곤 했다. 재언의 몫이었다. 한정 아이스크림은 그때가 아니면 팔지 않으니까 재언을 위해 남겨두겠다는 핑계였다. 재언은 그녀의 습관에 묘비 세우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더는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재언의 다짐은 변치 않았고, 냉동고는 일종의 공동묘지가 되어갔다.
---「묘비 세우기」중에서

아직 버려야 할 게 많았다. 냉동고를 열자 줄줄이 서 있는 아이스크림 통들이 보였다. 연주는 그 컵들을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봉투를 싱크대까지 끌고 왔다. 아이스크림 통을 하나씩 열자 짓쑤시고 파낸 흔적과 그 가운데 당당하게 꽂힌 플라스틱 숟가락이 보였다.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숟가락은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연주는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힘껏 숟가락을 잡아당겼다. 재언의 일부는 이제 자신이 가본 적도 없는 산에 흩뿌려질 것이다. 묘소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묘비를 세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아이스크림 주제에 묘비라니. 재언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궁금했다. 묘비는커녕 조금만 힘주어 당기면 부러지고 말 플라스틱 숟가락에 불과했다.
---「묘비 세우기」중에서

가로수 한그루 없는 도로로 햇빛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바람은커녕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있는 그늘이라곤 서로의 그림자가 다였다. 명조는 괜찮다고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괜찮아질지는 모르나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주와 명조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핏발 선 흰자와 탁한 눈동자뿐.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꿈꾸는 일이 두려웠다.
---「사계」중에서

그녀는 조카손주인 이지와 영수 남매에게 자신을 이모할머니 대신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너희는 미국인이잖니.”
“진짜 이름이 뭐예요?”
“다카코면 족해.”
다카코는 귀찮은 눈치였다.
“너희 외할머니도 지금은 마리아잖아.”
아무리 미국이라 한들 이지와 영수는 외할머니를 한국 이름인 금화나 미국 이름인 마리아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예의범절에 엄격하던 어머니도 다카코의 폭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남매에게 다카코가 머무는 동안 가급적 영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 한국어로 기본 회화밖에 할 줄 모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추수감사절 식탁에서 유창하게 대화하는 이들은 외할머니와 다카코뿐이었다.
---「이지의 다카코」중에서

비겁할지언정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죽지 않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단순한 규칙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공고히 그 자리를 지켰다. 다카코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숨을 쉬었다.
“난 적어도 애들만큼은 쉽게 살 줄 알았어요.”
---「심해로부터」중에서

위로는 마약성 진통제와 같았다. 계속 바라고 바라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완치된 미래와 일상으로의 귀환을 약속했다. 위로에 중독될수록 환자들은 점점 더 무뎌져서 무너지기 쉬워졌다. 도무지 진전이 없는 치료와 계속 미뤄지기만 하는 퇴원일. 현재는 미래를 끊임없이 밀어냈다. 모든 희망을 잃고 무력해진 환자들은 멍하니 앉아서 완치의 기적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영원한 환자가 되었다.
---「캐리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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