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도면을 그린다. 그림만으로는 크기를 알 수 없으므로 치수를 기입한다. 그것이 어느 곳의 치수를 가리키는지 나타내기 위해 기준선도 그려 넣는다. 그림과 기준선과 치수, 여기에 축척이라는 4박자가 갖춰졌을 때 ‘그림’은 비로소 ‘도면’으로 승격된다. 완성된 지저분한 상태의 도면을 깨끗하게 다시 그릴 때는 순서가 바뀌어서, 축척을 정한 다음 기준선을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치수를 기입한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도면은 매우 복잡한 그림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복잡할수록 자기만족을 느끼는 직업병에 걸리기 쉽지만, 건축주는 도면을 본 순간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칠 것이다. 특히 치수가 문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숫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일으킨다. 치수 단위가 밀리미터인 것도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불러온다.
---p.27 「기본 4. 누구를 위하여 도면은 존재하나 - 응용 편: 그림의 승격」 중에서
설계도는 예정도다. 그리고 모든 일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도면상으로 냉장고가 딱 들어가는 것은 먼저 냉장고를 그곳까지 운반할 수 있다는 대전제를 통과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냉장고를 들여놓을 때 벌어진 웃지 못할 촌극은 주택의 설계 · 감리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상징한다.
가령 공사 현장에 반입되는 대표적인 물건 중에 빌트인 가구(커스텀 가구)가 있다. 빌트인이라고 하지만 현장에서 처음부터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공방에서 만든 다음 가지고 들어온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차는 책장은 뉘어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더라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빌트인 가구의 경우 길이도 신경 쓰는 편이 좋다. 설계도에서는 공간이 허용하는 한 얼마든지 길게 그릴 수 있지만, 8자(2,400밀리미터)가 넘는 재료는 특별 주문을 해야 한다.
---p.41 「기본 7. 건축 현장 반입 매뉴얼 - 세상만사 여유 있게!」 중에서
오늘날 가정에서는 조리한 음식을 즉시 먹는다는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가족 전원이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졌다. 한 번에 모두가 먹을 분량의 음식을 조리해 놓고 가족 개개인에게 각자가 먹을 수 있는 시간에 가져다주거나 본인들이 알아서 챙겨 먹는 것이 현실이다. 냉장고, 보존 용기, 랩, 호일, 그리고 전자레인지 같은 근대적 장치들 덕분에 이런 방식의 식사가 가능해졌다.
현대에는 식사 공간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기회가 줄어들었기에 더더욱 소중해진 가족 모두의 식사 시간을 위해 충실히 갖춰 놓아야 할까? 이는 물론 당신과 건축주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다만 평소 아일랜드 키친에서 홀로 음식을 조리해 쓸쓸하게 먹는다 해도 주말에는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충실한 식사 공간이 반드시 공간 낭비는 아닐지도 모른다.
---p.88 「기본 13. 먼 옛날, 조리와 식사는 같은 것이었다」 중에서
평소 사용하는 물건은 ‘꺼내서’ 정리해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어질러져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니 착각은 하지 말자. 깔끔하게 정렬해서 대기시켜 놓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정렬 방식이다. “거기 서 있어”라고 명령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조금 지나면 돌아다니기 시작해 어질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매달아 놓는 것이다. 매다는 것은 역학적으로도 안정된 고정 방법이다. 매달아 놓으면 물건들도 도망치지 못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게 보관하다가 써야 할 때 꺼내기 쉽도록 ‘수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 수납공간을 활용해 물건과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는 비결은 세 가지다. ① 가급적 문을 달지 않을 것, ② 다만 그대로 들여다보이지는 않게 할 것, ③ 일상적으로 수납공간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
---p.109 「기본 17. ‘정리한다 = 수납한다’가 아니다」 중에서
실내기와 실외기를 호스로 연결한 한 세트를 에어컨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에어컨 호스 속을 오가는 것은 ‘냉매’다. 물과 마찬가지로 냉매도 기체↔액체의 상태 변화를 통해 열량을 잠열의 형태로 떠안는다(128페이지 참조). 냉매는 이 성질을 이용해 실내기와 실외기 사이에서 기화 · 액화하면서 부지런히 열을 운반하는 것이다. 냉매 종류는 몇 가지가 있는데, 물보다 낮은 온도에서 증발하며 장치를 콤팩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선택된다.
냉매를 기화 · 액화시키는 것은 에바포레이터(증발기)와 콤프레서(압축기)의 콤비다. 만담 콤비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만담 콤비는 보케(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역할)와 츳코미(보케를 구박하는 역할)로 구성되는데, 츳코미 역할을 하는 압축기가 보케에게 열을 내며 분위기를 뜨겁게 가열하면 보케 역할인 증발기가 부드럽게 받아넘겨 식히는 것이다.
---p.131 「기본 20. 룸 에어컨은 만담 콤비다」 중에서
현장을 인도할 때는 ‘집’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처’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설계에 관여한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이 집은 준공한 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유지에 필요한 보수와 수선은 물론 가구와 설비 등 수많은 장소에 손을 댄 결과 ‘안식처’가 되었다. 거실 벽면 수납장은 설계 중에 도면을 그려 놓았지만, 건축주 부부가 “입주 후에 어떤 수납공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구상한 다음에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나중에 만들게 되었다. 또한 침실의 침대 헤드보드와 옷장도 살기 시작한 뒤에 크기와 수납량을 건축주 부부와 확인하면서 장소에 맞춰 만들어 나갔다. 거실과 침실 주변의 수납공간 제작이 끝나자 이듬해에는 소파 제작이나 오랫동안 사용했던 소파 테이블 개조 같은 자잘한 작업에 대해서도 상담 요청을 받았다.
---p.167 「63. 집이 안식처로 바뀌기까지」 중에서
애초에 ‘건물의 튼튼함’이란 무엇일까? 무엇에 대한 튼튼함일까? 지진 · 벼락 · 화재 · 아버지! 그렇다! 흔들림 · 충격 · 불 · 소음에 대한 튼튼함이다. 이를 분명히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먼저 소음에 대한 차음 성능부터 살펴보자. 외부 소음이든 실내에서의 소란이든, 건물 지붕이나 벽을 통해 안팎으로 전해진다. 음에 대한 저항력은 단순히 무게의 영향을 받는다. 이를 ‘질량 법칙’이라고 한다. 철근 콘크리트조 · 철골조 · 목조를 비교하면 철근 콘크리트조의 승리다. 다만 실제 건물의 경우 개구부도 영향을 끼치므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음으로 화재에 대한 내화 성능을 살펴보자. 건물이 불에 잘 타지 않는지 어떤지는 사용된 건축 재료의 불연성에 따라 결정된다. 콘크리트는 그 자체가 불연재로서 불연성이 우수하다. 그러나 철골조나 목조도 주요 구조부를 불연재로 피복하면 동등한 내화 성능을 얻을 수 있다.
---p.149 「기본 23. ‘무겁다 = 튼튼하다’가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