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정착, 독립, 학업, 결혼, 그리고 출산.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나의 30~40대가 그렇게 평범한 듯 훌쩍 지나갔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밤을 지새울 때가 많다. 내겐 그 시간이 매우 힘들었다. 육체적인 고단함도 한몫했지만, 실은 고독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아이에게 마음을 다해 집중하다가도 어느 순간 커다란 쇳덩어리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까매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까만 밤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던 작가로서의 나와 예술가로서의 시간을 떠올리곤 했다. ‘내 시간을 예쁜 색으로 채우고 싶어.’ ‘작품 하면서 긍정의 에너지를 받고 싶어.’ 불안과 고독이 밀려올 때마다 나를 일으켜준 것은 언제나 그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억눌렀던 나의 예술가의 본능과 끼를 다시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했다. 그림을 그리고, 만들고, 재료를 조합하면서 나는 한참을 나와 놀았다. 그 시간이 좋았다. 그 시간 속의 나는 온전히 나 자체였다. 그렇게 다시 나는 예술가가 되었다.
---「여는 글」중에서
방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오빠의 작은 램프로 불을 밝히자 마법처럼 집이 살아났다. 잠옷을 입힌 인형을 토닥거리며 종이상자로 만든 집 옆에 누웠다. 따뜻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만든 인형 집.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을 갖고 놀다가 스르르 잠이 들면 나의 몸과 인형의 집을 온돌바닥이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책상 아래 놓인 종이상자 집에서 나는 꼬마 예술가가 되었다. “일아야, 너 아직도 인형 놀이하니?” 엄마의 목소리가 방문을 비집고 들어올 때면 나는 상상 속의 세계에서 미끄러져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만든 최초의 집. 그 집은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장난감보다 소중했다. 엉성하지만 내가 직접 오리고 붙이고 세우고 꾸며 만든, 이야기가 있는 집이었다. 상상은 질리지 않는 최고의 장난감이다. 오래 가지고 놀면 놀수록 예상 밖의 선물을 안겨준다. 상상이 실재가 되곤 한다. 나는 종이상자로 ‘공간 놀이’를 했고, 내 작은 손끝으로 만든 행복한 집에서 세상 멋진 주인공이 되었다.
---「여섯 살과 종이상자」중에서
화가에게 재료는 도구적 역할로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재료 자체가 갖는 본래 성질에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세계의 본질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나무로 만든 집이 되고, 나무의 성질을 담은 집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예술가의 집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 나무만큼 내가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는 완벽한 재료가 또 있을까! 나무판을 주된 재료로 고른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갉아내거나 마른 붓으로 채색할 때 사각거리는 나무의 질감은 역시 최고다. 책받침을 대고 샤프로 처음 글씨를 쓸 때와 비슷한 청량감이 손목을 타고 올라온다. 사실 별거 아닌 이유가 작업 동기를 북돋아주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사용하기 편리한 전자식 키보드 대신 ‘타닥타닥’ 소리가 정겹다는 이유로 뽀얀 먼지가 쌓인 타자기를 일부러 꺼내 두드리는 것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진척되는 조용한 밤의 작업은 나를 행복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갈고, 덧붙이고, 문지르고, 칠하고 그렇게 한 채의 집이 완성되는 날이면 나는 설레는 마음에서 퍼져나가는 잔잔한 울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 짓기」중에서
그동안 내가 제작했던 집 중에서 가장 장시간에 걸쳐 제작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시리즈 형식의 종이인형 놀이다. 물론 내 작품 속의 종이인형은 사람이 아니다. 머리와 몸통, 다리로 구성된 몸 대신 1층, 2층, 다락으로 이루어진 3단계 구조의 집이다. 세 부분 각각은 여섯 종류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자기만의 집으로 완성할 수 있다. 파트마다 여섯 가지 변주가 가능하니 경우의 수도 엄청 늘어나는 셈이다.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집을 ‘지어보는’ 놀이는 마치 여러 종류의 옷을 구입하여 요리조리 ‘믹스 앤 매치’ 해보는 것과 같다. 그러다 보면 ‘이거야’ 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유년 시절에 즐기던 종이상자 집 놀이를 나무판 위에서 구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옛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먼저 나올 대답일 터다. 그다음은? 집 자체에 대한 ‘찐사랑’일 것이다. 다양함과 개성을 입은 여러 종이인형과 함께 나는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Let’s play!”
---「Play, 놀이를 놀이하다」중에서
집은 여러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생활의 터전이다.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구현하는, 어찌 보면 모순된 속성을 지닌 공간이다. 문과 창문, 문턱과 창틀, 벽과 기둥, 실내와 테라스는 서로 분리되고 또 이어진다.
실내 공간은 종종 외부를 밀어내지만, 한편에선 바깥의 것들을 들여놓아 내부 풍경을 완성하기도 한다. 유리창을 투과한 맑은 햇살이 가득한 집 안을 떠올려보라. 그 순간엔 거실 소파 위로 둥둥 떠다니는 먼지마저 사랑스럽다. 집은 사람을 닮았다. 누군가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집은 무기물에서 유기체로 변신한다. 집안사람들의 개성과 성향을 반영하면서 함께 호흡하고, 함께 나이를 먹는다. “우리 집은 엄마 때부터 식물이 잘돼”라거나 “우리 집은 고양이털 투성이야”라거나 “우리 집에선 부엌만 크고 좋아”라고 말할 때, 당신의 마음엔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당신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가? 당신의 집은 당신을 닮았을까, 그 집을 당신은 사랑하는가?
---「집, 안팎의 이야기」중에서
나는 한국과 캐나다를 자주 오간다. 덕분에 높은 곳에서 저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할 기회가 많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 위의 세계는 커다란 마을 같다. 국경이나 지역을 나누는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바다와 산, 호수나 강, 형형색색의 건물들로 식별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까이서 볼 때 이질적이었던 것들이 멀리서 보면 통일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참 묘하다. 어떤 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 더 선명하게 파악된다. 사람도 그렇다. 특히 가족은 더 그렇다. 한 발 떨어져서, 며칠 다른 곳에서 바라보면 더 선명하게 파악된다. 근접촬영 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대상의 맥락을 드러내주기 때문일까. 이럴 때 예술가의 통찰력은 배가(倍加)된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의 통찰력은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다. 그런데 관찰의 핵심은 ‘근접’이 아니라 ‘거리’다. 내가 어느 위치에서 어느 각도에서 보는지에 따라 관찰 대상은 모양을 달리한다. 예술가는 어쩌면 잘 발달된 조리개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집과 비행기」중에서
“Bundle up! (칭칭 감고 외출하세요.)”
내가 이토록 힘들게 겨울을 보냈던 이유는 캐나다의 긴 겨울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 강추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 탓이기도 하다. 캐나다 사람들은 겨울을 여유 있게 보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집집마다 모자와 장갑, 장화를 비롯해 온몸을 보호해주는 방한복과 온갖 종류의 제설 장비를 갖추고 있다. 방한복을 단단히 껴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아이들은 어지간한 겨울 날씨에도 밖에서 신나게 뛰어다닌다. 겨우내 읽을 책 몇 권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놓고 난방만 잘한다면 겨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즐거움과 가족과 실내에서 보내는 따스한 시간은 더없이 안온하다. 캐나다에 살면서 나는 겨울이 주는 매력을 오붓하게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사는 데 익숙하다.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무모한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느긋하다. 나도 그들처럼 희망을 품고 봄을 기다린다. 긴 겨울의 추위가 지나면 온 세상을 꽃향기로 물들일 봄이 곧 오리라는 희망을 말이다.
---「캐나다의 긴 겨울」중에서
길을 가다 보면 곳곳에 목표지점까지 얼마나 더 남았는지 보여주는 마일스톤(이정표)들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 비롯한 ‘마일스톤’(milestone)이란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거치는 굵직굵직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벤트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거치며 성숙한 인격으로 무르익으려면 좋든 싫든 반드시 겪어내야 하는, 때로는 기쁨과 고통이 수반된 인생의 이벤트들. 아기가 생애 처음으로 내딛는 걸음마가 그렇고, 사춘기가 그렇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겪은 경험이 그렇고 첫사랑이 그렇다. 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꽃은 사랑과 축복을 담은 존재다. 생의 크고작은 이벤트를 겪으며 피어낸 아름다운 시간의 흔적이다.
---「Milestones」중에서
나의 집은 ‘심장의 공간(A Space for the Heart)’이다. 지지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열정을 품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따뜻한 느낌을 받고 행복을 느끼며 무한한 상상에 흠뻑 빠지길 원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물다 가는 친구의 집처럼 편안하고, 오래 못 보면 궁금하고 그리워지는 곳이면 좋겠다. 집을 통한 창작 활동이 내게 위로를 주듯이, 나의 집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멈췄다가 다시 갈 수도 있고, 가다가 잠시 멈출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상자에 담듯이 잠시 보관해두었다가 생각나면 다시 꺼내어 보고 천천히 가던 길을 다시 가면 된다. 남들이 다 가는 길보다는 내가 찾아낸 길을 가면 좋겠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빠른 발길보다 내 마음이 원하는 길을 천천히 가면 좋겠다. 주변의 것들을 가슴에 꼭꼭 새기며 걷다 보면, 긴 겨울이 떠나는 모퉁이에 나보다 먼저 온 봄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닫는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