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자존심이 뭐라고. 쓸데없는 자존심만 버려도 몇 배는 편하게 살 수 있을걸? 그리고 네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
“내가 틀리다니?”
“세상에 귀신이나 괴물 같은 건 없다는 얘기.”
“어……?”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나야 친구들하고 멍청한 내기를 했다지만, 이 시간에 다른 아이가 학교에 있을 리가 없다. 또 다른 의문점 하나. 분명, 아까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 지금 깨달은 게 있어.”
“뭔데?”
“아까 네가 뒤에서 다가오는 모습이 안 보였어.”
“흠.”
“거울에…… 네가 안 보였다고.”
“그래?”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차가운 벽이 등 뒤에 닿았다. 식은땀 한 방울이 이마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등으로 굴러 떨어졌다.
“원래 흡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거든.”
박쥐 소년이 씨익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 두 개가 창문 사이로 새어 든 희미한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 pp. 19~20
반 애들이랑 한 내기는 장난이었지만 가람이라는 아이에게 일어난 일은 장난이 아니다. 만약 제이가 제때 날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도 가람이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번 한 번 정도는 용감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 용기를 내 보고 싶었다.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일부러 굳센 표정을 띄우자 제이가 내 두 눈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pp. 67~68
“걔를 데리러 왔구나! 안 돼! 웃기지 마! 그렇게 놔둘 것 같아?”
거울 귀신이 비명을 지르자 사방에서 형체가 일그러진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전부 거울 세계의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놈도 내 모습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저런 그림자에 불과했을 거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힘껏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거기 서! 저 녀석을 잡아! 당장!”
뒤에서 거울 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 p. 120
“좋아, 우리가 이 세상의 슬픔을 모조리 없애 버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제이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 그런가?”
“응. 항상 이겨 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뭐, 네 각오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이 세상엔 정말 많은 슬픔이 떠돌고 있어. 그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제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어떤 괴물보다도 사람이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제이. 묻고 싶은 말은 여전히 많았으나 아직은 묻지 않기로 했다. 제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 p. 162
머릿속에서 생각이 머리를 거치기도 전에 말부터 내 입에서 불쑥 튀어 나갔다.
“아니, 진짜 괴물은 당신이야!”
헬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흡혈귀들이 당신보단 훨씬 인간적이야! 적어도 내 친구들은 인간들을 보는 족족 해치우려고 하지는 않거든. 왜냐하면 슬픔을 알고,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아니까! 그리고 파괴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분간 못 하는 당신과 달리 늘 진실을 찾아 헤매니까!”
---pp.65-66
“불행 포식자……!”
거울 귀신을 깨우고, 소원 채팅방을 만든 장본인. 오래도 록 만월시에 도사렸던 어둠의 근원이자 모든 일의 원흉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날 그렇게 부르나 보군.”
검은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가운데 거대한 그림자가 비웃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오랜 세월 동안 아주 많은 이름을 가졌거든. 최초의 어둠, 불멸의 악, 악몽의 왕, 검은 병……. 하지만 아무도 진짜 이름을 몰라. 물론 나 자신도.”
불행 포식자가 낄낄거렸다.
“하긴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
“만월시 사람들을 잠에 빠트린 게 바로 너지?”
“그래,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나?”
불행 포식자는 마치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매만졌다.
---p.147
‘모두를 지키고 싶어!’
그러자 빛의 끝이 내게로 이어졌다. 빛 무리가 나의 손안에 모여들어 마치 활과 같은 형태를 이뤘다. 빈약한 상상력 이었지만 게임 속에선 멋지기 그지없었던 내가 한 번 쥐었던 커다란 빛의 활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 손에 뭉쳐진 빛 무리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러자 내 손길을 따라 빛이 일직선으로 늘어나더니 눈부신 화살이 되었다. 모두의 마음이 모여서 만든 단 하나뿐인 화살이었다. 사방에 가득 찬 어둠을 가르고, 최초이자 마지막 일격을 날릴! 뒤에서 숨을 죽이며 말하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아무것도 헛되지 않았구나. 네가 지나온 시간들은. 헛되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말이야.”
순간 거대한 검은 해일이 우리 머리 위로 덮쳐 왔다. 문득, 정말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살은 한번 시위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 여기서 실패하면 모두가 끝장이야.
---pp.173-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