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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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0쪽 | 754g | 170*223*23mm |
ISBN13 | 9788931559927 |
ISBN10 | 8931559925 |
발행일 | 2023년 0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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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0쪽 | 754g | 170*223*23mm |
ISBN13 | 9788931559927 |
ISBN10 | 8931559925 |
증보판을 내며 초판 여는 글 제3부, 용쟁호투의 역사와 전설 25. 천하의 동작대여! 영원하라 _‘동한 말의 실록’, 조조와 건안 문학 26. 유비와 손잡고 조조를 친다 _오나라 참모 중의 참모, ‘노숙’ 27. 손권, 수성(守城)의 군주로 우뚝 서다 _동오의 4대 권문세족 28. 눈물 속에 숨긴 발톱을 드러내다 _양주의 실질적인 맹장, 한수 29. 난세에는 신의보다 천하가 먼저다 _방통의 죽음, 촉한 멸망의 시작 30. 술고래 장비, 지혜로 엄안을 포섭하다 _후주의 황후가 된 장비의 딸들 31. 두 영웅의 형주 사랑, 배반의 서곡 _한말 청류의 대표 주자, 난세에 그 뜻이 지다 32. 이미 농(?)을 얻었는데 또 촉(蜀)을 바라느냐 _조조의 야심이 숨은 글씨, 곤설(袞雪) 33. 유비, 한중왕(漢中王)에 오르다 _관우에 필적할 명장, 황충 34. 관우의 교만함에 형주를 잃다 _선비로 인정받고 싶었던 신의(神醫), 화타 35. 관우,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_관우 신앙의 탄생과 두 가지 믿음 36. 천하도 도원결의 다음일 뿐이다 _이릉 대전, 천하 삼분을 위한 필연의 전쟁 제4부, 천하는 누구의 것인가 37. 공명! 나를 대하듯 내 아들을 보좌해 주시게 _탁고(託孤), 철저히 계산된 유비의 유언 38. 망국과 건국의 사이에서 _권력 찬탈의 평화적 수단, 선양(禪讓) 39. 하늘이 절대로 너희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_헌목 조황후 조절(曹節)의 뒤엉킨 삶 40. 난세에 꽃으로 피어 낙신(洛神)으로 죽다 _『감견부(感甄賦)』, 조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41. 마음을 얻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다 _촉한 정권의 성립과 신구 세력의 조화 42.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 _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충신이 아니로다 43.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_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44. 뜻을 이루지 못하였건만 몸이 먼저 눕도다 _제갈량 북벌,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 45. 촉군의 울음소리만 검각을 넘어가네 _강유의 북벌이 남긴 것 46. 촉한을 버리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_익주파의 선택 ‘촉한의 멸망’ 47. 어찌 저런 자가 황제가 되었는가 _제갈량, 『삼국지연의』 최고의 주인공 48. 앞날을 헤아리지 못하면 걱정거리가 생긴다 _손씨 정권의 탄생, 발전 그리고 멸망(必亡)의 과정 〈에필로그〉 *절절한 이야기 서린 장강 삼협을 보다 _천하는 공물(公物)이다 |
삼국지 기행 2
허우범
성안당/2023.5.24.
sanbaram
<삼국지 기행 2>는 적벽대전 후부터 촉과 오가 망하고 조씨의 위가 사마씨의 진나라로 바뀌는 때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촉나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영토가 적고 군대도 약하였다. 천험의 요새가 국토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제일 먼저 멸망하였다. 무능한 유선이 날마다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다. 위는 가장 넒은 영토와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천하제일의 국가였다. 누가 보아도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부 통치 집단 간의 격렬한 권력 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마씨가 권력을 빼앗았다. 권력을 장악한 사마씨는 촉을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 오는 영토도 넓고 국력도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촉이 멸망한 후, 홀로 세력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교만하고 극악하며 음탕하고 무도한 손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나아가 대신을 함부로 죽이고,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였다. 그의 16년 재위 기간 동안 오나라는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그 과정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통은 익주 공략으로 촉나라 건국의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 전사함으로써 결국 촉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방통의 죽음으로 제갈량이 익주로 오고, 형주에 홀로 남은 관우는 교만한 자존심만 믿고 정세 판단을 잘못하여 형주를 빼앗기고 목숨도 잃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이에 사태는 급전직하로 변하여 오와의 동맹이 깨지고 장비와 유비도 사망하니, 촉은 건국과 함께 도미노처럼 멸망의 길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p.117)” 그 시작이 방통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장비가 형인 관우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해인 21년, 장비의 장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유비의 아들인 유선은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해인 219년에 왕세자가 되었다. 유선의 나이 13세였다. 223년, 유비가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유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는데 당시 17세였다. 그러하니 황후와 동갑인 것이다. 장 황후는 황후가 된지 14년 만인 237년에 아이가 없이 죽었다. 그 후에 238년에 황후의 동생이 황후에 올랐으나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후한 말기의 전설적인 의사로 알려진 화타는 원래 수리와 경전에 해박한 학자적 선비였다. 그는 의술에도 능통하였는데, 어지러운 난세에 질병과 부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는 데 활용하였다. 화타의 의술은 신기에 가까워서 내과와 침구뿐 아니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 인해 원근 각지에서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p.199)” 화타가 살던 시대의 의술은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강하였다. 그런데 화타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발명하여 외과 수술에 응용하였다. 이는 조제와 침구 위주의 당시 의술에서 볼 때 매우 혁명적인 치료법이었다. 화타가 신의로 추앙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외과의 비조’이자 ‘체육의학(오금희)의 창시자’인 화타는 조조의 주치의가 되었지만, 이를 버림으로써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화타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조조의 주치의가 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말을 빌리면, 본래 선비로서 인정받기를 바랐던 화타가 조조에게서 한낱 방술사로 간주되자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기 219년, 58살의 관우는 오나라 여몽의 군대에게 패해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에게 죽게 된다. 그러나 “관우는 중국뿐 아니라 화교 문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손길이 닿아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웬만한 중국요리집의 입구를 살펴보면 재물신인 관우상을 볼 수가 있다.(p.218)” 삼국지의 무수한 영웅들 가운데 유독 관우가 신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고의 소금 생산 지역인 산서성 운성이다. 소금은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에 국가가 관리하였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는 소금 전매는 산서상인들의 밀매와 이를 위한 전국 단위 비밀결사체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산서상인들은 그들만을 상징할 수 있는 결집체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고향이 낳은 관우에 주목하고 관우를 영웅화 하였다.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받는 정부도 관우의 영웅화에 앞장섰다.(p.221)” 상인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관우상을 만들어 놓고 군신, 재물신, 비밀결사의 수호신으로 믿었다. 산서상인들에 의해 퍼지기 시작한 관우 숭배는 민간의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으로 각종 전설을 남기며 신격화 되었다. 이러한 관우 신격화에 있어서 <삼국지연의>의 역할은 각별했는데, 저자인 나관중 또한 산서 출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조는 부자세습이나 종친 세습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선양의 형식을 빌려 왕조를 찬탄한 것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처음이다.(p.277)” 조비는 부친인 위왕 조조가 죽자 연호를 연강으로 바꿨다. 헌제가 비록 힘은 없지만 황제 자리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나관중에 의해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 된 유비는 죽어서도 황제로 칭송받고 관우는 죽어서 신이 되었다. 장비는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서민을 대변하는 소설 속 형상처럼 죽어서도 서민들의 삶에 든든한 믿음을 심어주는 대장부로 새겨져 있다. 이처럼 역사에서 촉나라는 미미한 나라였지만 그들 주인공으로 삼은 <삼국지연의>에 의해 후세에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삼국지 관련 유적들은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 하지만 이들 유적 모두가 잘 보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촉한 정통론의 영향으로 유비와 제갈량, 관우에 대한 것은 그것이 역사적인 것이든, 문학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즐비하지만, 나머지 유적은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버려진 채 사장되고 있다( p.298)” 최근 10여 년은 조조를 재평가하는 열풍이 일어나 조조와 관련된 유적지에 조조상이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이는 본래의 역사적 유적을 복원한다는 가치보다는 관광 상품 개발에 치중하는 경향이 더 심하다고 저자는 평한다. “유비의 성도와 손권의 남경도 건재한데 조조의 업성은 어째서 이토록 철저히 부서졌는가.(p.32)” 조조가 업성을 건설한 이후 580년 수나라 영견이 도시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기까지 모두 6대의 조정이 370여 년 동안 업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영건이 업성을 불태운 것은 그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킨 성주총과 울지형이 업성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하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5월에 노수를 건너 가을에 4개 군을 평정하고 그해 12월에 성도로 돌아온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아무리 신묘한 제갈량이라 하더라도 남방의 오지에서 일곱 번을 싸웠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불가한 것이다.(p.320)” ‘칠금맹획’은 한족 우월주위에 입각한 전설이 역사적 전고로 각색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전해 오는 ‘칠금공명’이야기가 소수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맹획 등의 반란은 소수 민족에 대한 한족의 경멸과 잔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며, 한족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첨사괴고 미화된 것이 ‘칠종칠금’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관중이 뛰어난 필치로 화룡점정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북공정사업 또한 필요하면 만들어내는 중국적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다. 지금은 어불성설이라도 밀어붙이고 백년 천년이 지나면 역사라고 우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사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출사표’는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후주 유선에게 올린 글로써, 충신의 진실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고금의 걸작이다. 이 표는 227년과 228년에 각각 작성했는데, 이를 구분하여 전후 출사표라고 부른다. 흔히 말하는 출사표는 전출사표를 말한다.(p.344)” 출사표는 진수의 <삼국지>의 촉서 ‘제갈량전’과 양나라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 등에 실려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임금이 해야 할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대해 논한 만고의 명문이다. 제갈량이 오늘날 탁월한 정치가로 존경받는 것도 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임종을 앞둔 제갈량은 자신을 정군산에 장사지내고 일체의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하였다. 후주 유선은 직접 영구를 정군산으로 호송하여 장사지냈다. 그리고 시호를 충무후라 하고, 면헌에 사당을 지어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유비가 성도에 입성한 지 50년이 지난 263년, 촉한은 위나라의 공격에 항복하였다. 후주가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그의 다섯째 아들인 북지왕 유심이 반대하였다. 후주는 듣지 않았다. 유심은 할아버지인 유비의 사당에서 통곡한 후, 부인과 세 아들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p.416)” 촉한의 권력은 형주파와 동주파에 집중되었다. 토박이와 다름없는 익주파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고 경제를 회복시키는 궂은 일만 주어질 뿐, 권력에서는 찬밥신세였다. 그들에게는 국가가 있기는 하되,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았다. 익주파의 불만은 고조되고, 결국 그들은 촉한의 멸망을 원하였다. 그렇기에 263년 후주 유선의 항복으로 촉한은 멸망하였다. 유비가 나라를 세운 지 43년이 되는 해였다. 유선은 성도에서 낙양으로 이송되었다. 위나라 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사마사는 유선을 안락공에 봉하고, 저택과 생활비를 지급하며 정중하게 예우하였다. 유선은 기분이 좋았다. 촉한이 멸망한지 13년이 지나서 오나라의 손호도 진나라에 투항하였다. 손호가 낙양에 도착하여 사마염을 알현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일명 ‘제갈령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편에 묘사된 제갈량의 다재다능함이 사실을 넘어 신기에 가깝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p.433)” 촉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쓰인 연의는 유비와 제갈량을 최고의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유비 참모로서의 제갈량은 등장부터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도록 하였다. 이후 모든 전투와 계략은 신출귀몰한 제갈량에 의해서 진행된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했을 때 독자들은 소설이 끝났다고 느낀다. 지혜의 화신으로 과장된 제갈량의 마력에 독자들이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소설은 유비아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하는 촉한 정통론에 근거한다. 촉한 정통론은 위정자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창출과 이를 통한 권력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 낸 장치다. 충성, 믿음, 의리, 덕망 등은 민중을 지배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뿐더러, 중국 대륙을 차지한 민족에 대항하는 한족의 대응 논리로도 훌륭한 것이기 때문이다.(p.466)” 촉한 정통론은 한족의 기질과 역사적 소망 그리고 대륙적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숙독하면 중국인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삼국지연의>는 중국에서도 광풍처럼 인기가 높은데, 그 열풍은 예전과 다르다고 말한다. 촉을 차지한 사마소는 그 위신이 나날이 높아졌다. 25년 촉이 멸망한 지 2년 후, 사마소가 죽고 장남 사마염이 위의 황제인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는다. 헌제가 피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했던 것 그대로 조환이 온몸을 떨며 사마염에게 황제자리를 넘겼다. 이렇게 사마의 이후 사마사와 사마소, 사마염 3대에 걸친 찬탈 계획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황제에 오른 사마염은 국호를 진이라고 하였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쟁투, 그것이 역사다. 이러한 쟁투는 각자의 소망을 담는다. 하지만 역사는 무뚝뚝하여 소망이나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망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소망하는’역사란 오직 인간의 사고 속에서만 존재한다.(p.467)” 역사는 천하의 모든 민족에게 골고루 기회를 준다. 천하는 개인이나 한 민족의 것이 아닌 공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늘도 영원히 자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 천하를 다 가지고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저자 허우범은 작가이며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초빙교수로 20여년에 걸쳐 중국 전역의 삼국지 현장을 답사하였다. 저서로 <삼국지 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황해로드>(공저) 등과 <여말선초의 서북 국경과 위화도>, <고려 시대 서북계 이해>(공저) 등이 있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8. 눈물 속에 숨긴 발톱을 드러내다≫, ≪29. 난세에는 신의보다 천하가 먼저다≫ 를 중심으로
저자의 삼국지기행의 여정은 '삼국지연의' 사건의 흐름을 좇아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2권은 천하삼분지계의 형성과 그로 인한 사건과 인물들이 얽혀있는 도시를 답사하며 그 흥미로움을 더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문득 괴테의 이탈리아(로마) 기행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두보, 소동파 또는 육유와 같은 당대의 문장가들이 이곳에 오기를 고대했고, 실제 와서 느끼고 시를 지어 노래하면서 그 감동을 표현한 것을 책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는 쉽게 오가기 힘들었던 중국의 지리적인 거리감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너무 (돈 되는) 관광지 조성에만 혈안이 되어있지는 않은가 싶은 정서적인 괴리감이 느껴진다. 역사적인 유적과 허구적인 유적을 구별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동안의 갖은 풍수해를 맞았음에도 버티고 있는 그동안의 유적을 어떻게 자연스레 유지하며 후대에게 자연스럽게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중화사상과 만만디정신, 동북공정사업 등은 과거를 현대와 미래에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지금의 잘못된 인식이리라. 또한 "중국인들은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허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저자의 표현은 얼핏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나에게 득이 된다면 무엇이든 취사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어찌 보면 잘못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방통에 대한 부분은 더욱 비판적으로 삼국지를 읽어야 함을 볼 수 있다. 방통의 죽음으로부터 촉이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마치 도미노와 같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복선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소설에서 극적으로 다뤄진 방통이 죽은 낙봉파와 혈분, 장비과 마초의 전승패 제방에서의 결투, 장비가 방통을 꾸짖기 위해 뇌양현을 찾아가는 일화, 마초가 가맹관을 공격한 것 그리고 관우의 양아들 관색과 (그의 처) 포삼낭의 무덤 모두 허구이다.
잘못된 아홉이 사실이라고 떠들면 진정한 하나는 묻혀 버리는 대중 심리의 활용,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역사적 공고화. 이는 비단 문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삼국지연의」는 이 부분에서 최고(最古)이자 최선(最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년 전의 '소화고성'과 다시 찾은 '소화고성 및 가맹관'의 모습을 비교해 가며 당시 저자의 감정을 담담히 전하고 있다. 또한 비록 지면에는 짧게 다뤄졌지만 '마등묘'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잠시나마 허탈한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책의 구성상 한 장은 '삼국지연의'에서의 사건과 이와 관련된 문학적 근거가 먼저 다뤄고 이어서 저자의 답사기를 보며 함께 유적지를 확인해 본다. 뒤이어 실제 삼국지의 허구와 진실을 가리며 한 장을 정리하는 내용을 끝으로 한 장이 끝나는데, 정리하는 글을 읽고 나면 앞서 나왔던 부분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정말 이 책은 삼국지에 푹 빠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귀한 책이다. 더불어 중국의 유적지 관리와 자의적인 역사해석에 대한 뜻을 함께 공감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게 느껴진다.
-본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당대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역사를 보다
어린 시절, 계몽사 어린이문고에 있던 삼국지로부터 시작해서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삼국지 등 삼국지 책을 차례로 읽던 기억이 난다.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매체가 발달하기 이전, 책만 읽던 시절에는 여러번 읽어도 질리지 않던 책이 삼국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불멸의 고전이자 위대한 문화유산이며, 그 속에는 인간사의 흥망성쇠가 웅대한 서사시로 펼쳐져 있고 오늘날까지 각 분야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글쓴이는 "[삼국지연의]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억지가 마치 진실처럼 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며 경계한다.
낙봉파도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다. 나관중에 의해 방통의 사망 장소가 결정되자 후세 사람들이 사천성 덕양의 험준한 지점에 낙봉파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청나라 때 시인이자 학자인 왕시진이 '낙봉파에서 방사원을 조상하다'는 시를 지었고 이것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수록되었다.
-용쟁호투의 역사적 전설 중에서, 117쪽 -
"[삼국지연의]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중독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잘못된 아홉이 사실이라고 떠들면 진정한 하나는 묻혀버리는 대중 심리의 활용.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 역사적 공고화. [삼국지연의]는 이 부분에서 최고이자 최선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책을 통해 "정사[삼국지]의 사실과 [삼국지연의]를 비교하면서 영웅들이 누볐던 현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반추해보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삼국지였기에 역사적 사실이 삼국지연의에서 변형된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변형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삼국지가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알던 기존의 삼국지 또는 비즈니스나 자기개발에 집중된 변형된 삼국지가 아닌 실제 역사속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삼국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큰 기쁨이다.
삼국지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인물은 조조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대척점에 서서 악역을 담당한 조조는 끝내 황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 자식인 조비가 황제에 오르도록 사전 준비를 해두고 떠난다. 조비는 황제에 오르면서 선양이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헌제를 산양공에 봉한다. 글쓴이는 산양공이 말년을 보냈던 산양고상을 둘러본다. 고성은 길을 만드느라 두 동강이 나 있고 성에는 마을 사람들이 일군 텃밭이 보인다. 힘없이 선양을 해야했던 헌제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해서 쓸쓸하다.
글쓴이가 찾은,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받아 황제에 오른 조비의 사당 안에는 정작 조비를 모신 곳이 없다. 관야류란 편액을 걸고 관우신을 모신 누각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때 명판관 포청천을 모신 포공전이 보인다. 조조가 자기 가족들의 사당으로 지은 문제묘 안에 정작 상관없는 인물들이 모여있으니 헌제의 선양을 바라보는 진정한 민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주는 예처럼 보인다.
삼국지 관련 유적들은 중국 전역에 퍼져 있지만 이들 유적 모두가 잘 보전되어 있지는 않았다. 관심없는 것은 버려지고 관심있는 것들은 북적거린다. 한편으로 요근래 재평가 받고 있는 조조의 유적은 새로 단장중이다. 공원으로 넓어지고 조조의 이름을 딴 대로도 생겼다. 오늘날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삼국지 인물의 흥망을 글쓴이의 여행과 함께 지켜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본래 역사적 유적을 복원한다는 가치보다는 관광 상품 개발에 치중하는 경향도 보인다. 삼국지연의 전반에 흐르던 관우신앙은 오늘날에도 여전한데 이 책 한편에는 돈을 내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관우상도 등장한다. 길흉화복을 빌고 자신의 경제적 부를 일구고자 하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현실 모습이 역사 유적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삼국지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를 비롯해 조조와 손권 등 많은 인물이 나와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들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쓴이는 "소망하는 역사란 오직 인간의 사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그 당시 북방민족에게 핍박받고 있던 송대 중국민족의 소망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국지]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계속 읽히고 인기있는 이유는 책을 읽는 독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소망을 삼국지 인물과 사건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글쓴이는 "[삼국지연의]가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삼국지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였으니 '역사적 허구다'라고 말하면 연의임을 내세워 문학 작품임을 강조한다. 대다수 독자들은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알려고 신경쓰지 않는다. [삼국지]가 주는 소설적 재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답한 글쓴이는 소설적 재미에 빠진 독자들에게 자신의 여정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알려주고자 한다. 글쓴이는 이국 멀리 갈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역사 현장의 사진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삼국지의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대충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숨은그림 찾듯이 사실과 소설의 경계를 글쓴이와 함께 가다보면 장강에 이르러 삼국지기행이 멈춘다.
조조와 그의 후손들의 흥망을 볼 수 있는 업성과 동작대부에서 시작한 [삼국지기행2]의 여정은 역사의 흐름과 같이 고고히 흐르는 장강에서 마무리한다. 글쓴이는 장강의 유람선을 타고 장강을 둘러보다가 삼협댐의 완공으로 변한 마을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경제발전을 위하여 건설한 댐은 많은 문화유산을 물에 잠기게 했다. 물 속에 잠긴 문화유산은 문화에 소홀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현대인의 경제적 욕심에 물에 가라앉았을까.
"밤낮없이 흐르는 장강"은 역사속 영웅과 선비들을 품고 흐른다. 장강의 물결처럼 세월은 흐르고 글쓴이가 돌아본 삼국지의 역사유적들은 세월의 흔적을 타고 있다.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소설 [삼국지연의]와 그 현장을 따라가는 기행 속에서, 장강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듯이 자연 속에 한낮 나약한 인간의 존재와 그 인간들의 소망이 담긴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성안당(책문)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