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재를 가장 사무치게 느끼는 순간은 비탄의 언어를 찾으려 하다가 그저 진부한 말만을 발견할 때다. 우리가 겪은 가장 암울한 불모의 경험을 모두가 보는 앞에 던져본다 한들 누구 하나 알고 싶어 하지 않음을 확인할 때다. 무언가가 없어졌다. 생생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유사 이래 인간다움을 규정해온,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가 사라진 것이다.
---「부디 내가 사라지기를」중에서
매혹은 의미를 통해서 증폭되는 작은 경이로움이자 이야기와 기억으로 짜인 그물에 사로잡힌 매력이다. 매혹은 동종요법과 비슷해서 소량의 경외감이 필요하며, 이 경외감은 우리가 찾아 나설 때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조용한 마법의 자취다. 매혹은 지구를 이루는 요소들과 우리가 하나의 실로 이어진 존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고, 지구와 우리의 연결에 힘이 잠재하며 우리 인식의 경계에 찌릿한 흥분이 있다는 감각이다.
---「부디 내가 사라지기를」중에서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 그 작용을 통해 물체를 변형시키며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기술하는 용어인 히에로파니hierophany(성스러움을 시현한다는 뜻의 성현聖顯을 말한다 ─ 옮긴이)를 창안했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나무나 돌이나 빵 조각을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히에로파니, 즉 성스러움의 물체로 바꾸어놓는다. 믿는 이들에게 히에로파니는 환상적인 무엇이 투영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 현실이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히에로파니는 단지 그 표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층을 인지하는 경험이다.
---「히에로파니의 순간」중에서
“한때 인간의 본성은 ‘신’이라 불리며 지시하는 부분과 ‘인간’이라 불리며 지시에 따르는 부분,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인류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의식하지 않았으며 개념, 생각, 감정을 분리할 수 없었고, 그런 것들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다고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인류는 생각을 일련의 환청으로 경험했고, 이를 신의 음성이라 믿었다. 이 음성은 인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했고 인류는 그 지침에 따라 살았다. 《일리아드》와 《길가메시 서사시》의 시대에 인류는 모두 목소리를 듣는 자들이었다.
---「양원적 의식과 직관」중에서
그것은 프로이드를 당혹스럽게 한 ‘대양감oceanic feeling’으로,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는 경험한 적이 없으나 어떤 이들은 경험했던 ‘한계나 경계가 없는 느낌’이다. 프로이드는 그것을 분명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개념이 아닌, 진화된 정신의 기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양감을 종교적 원천으로 여기는 본래의 개념에 대한 그의 불만에 공감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나는 수년간 그 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계속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서서히 그 느낌은 확장되어 내 안의 반란이 되었다. 열렬하고, 끈질기고, 불온한 느낌. 그 느낌은 소리치고 깃발을 흔들며 나의 벽을 넘어 불어났다. 나는 그것을 꺼뜨릴 수 없었다.
---「흑태자 샘의 순례자」중에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서서, 나는 샘물에 아무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축복이나 소원도, 혹은 스스로 찾을 수 없는 지식도. 나는 그저 히에로파니의 잔재를 간직한 장소와 접촉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이곳에 온 수많은 길 잃은 영혼들과 나 사이의 연대를 느끼면 된다. 어떤 기도보다는, 이곳을 돌보고, 보이지 않는 열망의 연속성을 향한 몸짓이 내게는 필요했던 것이었다. 샘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는 계시나 기적이 아니고, 수백 년을 가로지르는 미지의 흐름이자, 이해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연결이다.
---「흑태자 샘의 순례자」중에서
불은 우리의 통제력의 한계 속에서, 인간이 가진 감정의 모든 범위를 건드리면서, 우리를 다시 생명의 순환과 맞닿게 한다. 불은 우리에게 혹독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유약한 환상을 불태운다. 불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표면적 존재, 얄팍한 영역만을 경험할 뿐이다. 다시 온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불에 동화되어야 한다.
---「수만의 별이 떨어지는 밤」중에서
놀이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참여자가 선택한 공간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순수한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고 새로운 생각, 새로운 자아를 실험할 수 있는 모래상자와 같은 것이다. 삶을 상징하는 하나의 형태이자, 하나의 현실을 또 다른 현실과 뒤바꾸고 그 의미를 캐내는 방식이다. 놀이는 매혹의 한 형태다.
---「어른들의 심층놀이」중에서
던지니스의 귀는 나의 신성한 장소이자, 즐겨 찾는 순례지이다. 내 눈에 그것은 음파 이상의 것들을 모으는 것처럼 보인다. 던지니스의 귀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감정들, 향수, 비탄, 아웃사이더의 비애를 응집시키고 다시 공중으로 내보낸다. 거기에 가면 잠시 고즈넉한 상태로, 그 구조물의 콘크리트가 표출하는 부드러운 야만성, 그리고 어찌 되었건 변방일 수밖에 없는 주변 지형 속에 구조물이 녹아들어간 모습을 달콤하게 음미할 수 있다. 던지니스는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인 듯한 인상이 든다. ㅍ원자로와 묘한 크기의 기차들, 고철로 지어진 집들. 물론 이질적인 것들의 안식처가 된 그곳에 불안정한 감정을 몰고 온 나 역시 이질적인 존재이지만.
---「비행, 삶의 인터미션」중에서
브로켄 유령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유령으로, 문자 그대로 불안정한 표면에 비친 우리 자아의 어두운 부분을 투사한다. 우리가 손을 들면 그 형체도 그에 반응하여 손을 든다. 단, 하늘의 포물선에 거의 닿을 듯해 보인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가 달리면 그 형체도 달린다. 단, 우리라면 바위에 걸려 넘어질 산 위를 성큼성큼 달린다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마치 우주의 불가사의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머리 위에 후광을 두르고 있는 모습의 우리 자신이다
---「후광을 입은 유령」중에서
가끔은 나의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생각이 이미 내 안에 잠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관심, 의식, 혹은 주의 깊게 숙고를 추구하는 것은 나의 외부에서 무언가를 초자연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 나에게 필요한 통찰을 얻기 위해 내가 아는 것을 재배열하는 경험을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사고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상징적 사고는 일상 속에서 촉발될 수 있고, 곧장 혈류로 스며드는 형태로 나타나는 광대한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나는 내 달빛 그림자를 가지고 노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하겠다.
---「에필로그: 아이테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