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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레일라 슬리마니
관심작가 알림신청Leila Sli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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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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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절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치유하려고 하거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면 안 된다. 오히려 실험실 조수가 표본 병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듯 자신의 슬픔을 배양해야 한다. 상처를 다시 헤치고, 기억을 더듬고, 부끄러움과 이전에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 p.12 물론 오늘처럼 글이 안 써지는 날은 자주 찾아온다. 때로는 이런 날이 며칠씩 계속되어 깊은 좌절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편중독자나 모든 중독의 희생자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부작용과 구토, 결핍의 위기, 고독을 잊어버리고 오직 도취만을 기억한다. 그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를 통해 말하기 시작하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이 절정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 p.14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우리 것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침묵을 가지고 노는 것이며, 실생활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문학은 억제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을 때 열정적이지만 진부한 문장으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꾹 참듯, 그렇게 자제하는 것이다. 문학은 침묵의 에로티시즘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 p.25 나는 문학이 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것은 의사에게 의학이 뭐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인 질문이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실감한다. 이 같은 무력감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글을 쓴다. --- p.65 이 세계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를 잊고 싶지 않다. 이 세계는 아마 한 편의 소설이 될 것이다. 오직 문학만이 이 묻혀버린 삶들을 다시 드러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를 떠난 지 20년이 되었다. 일종의 우수가, 내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 p.71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은둔하고, 따뜻한 아파트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벽돌로 벽을 쌓는 것만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확장하고 정복하겠다는, 그리고 세계와 타자, 미지의 것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성벽 뒤에서 살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 p.74 어쩌면 바로 그것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닐까? 잊힌 것을 되살리는 것, 망각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과거와 현재가 힘들게나마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것. 매몰되는 것을 거부하기. --- p.87 이 도시의 호화로운 건물들이 물과 진흙 속에 파묻히고, 영광의 기억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잊히고, 포석이 깔린 광장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니스는 그 안에 파괴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도시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든 것은 아마도 이 취약함일 것이다. --- p.91 사라짐으로써, 내 삶에서 자신을 지움으로써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감히 가지 못했을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것은 부끄럽고 슬픈 생각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나는 그 진실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장애물이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나의 운명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 p.111 문학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부분을, 빠진 것을 채우는 데 쓰인다. 파내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상상하고, 추억과 영원한 강박의 조각들을 서로 이어 구성한 하나의 시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 p.116 완전히 이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저곳에 사는 것도 아닌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일체의 정체성을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또 스스로가 배신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 성공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었다. --- p.134 역설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어떤 장소에서 떠날 가능성이 있어야만 그 장소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것, 그것은 유폐와 강요된 부동 상태, 무기력의 반대다. --- p.142 나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고 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주시하고 내가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채우기 위해 섬에 산다. 글쓰기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대체로 이렇게 단정하는 것을 경계한다.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나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행복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 p.151 |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가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떠올린, 말하지 못한 것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침묵을 가지고 노는 것이며, 실생활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뮤진트리에서 출간하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는 프랑스 스톡 출판사의 기획 작으로, 작가가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떠오르는 사유를 글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두 주인공은 모로코-프랑스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와 베네치아의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이다. 모로코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활동하는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보지 않겠느냐는 편집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지인들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아예 전화마저 차단해야 할 처지인데도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이유는, ‘갇힌다’는 것이 주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 때문이었다. “나도 나갈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에 혼자만 있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은 소설가의 환상”이기에. 작가는 베네치아에 도착한 후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아무 말 없이 돌아다닌다. 사진을 찍거나 글감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 오래된 도시에서의 산책을 순전히 내적인 체험으로 만들고 싶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온통 환하게 밝히고 사는 세상과는 딴판인, 베네치아의 어두운 골목길들을 걸어 미술관에 당도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이 거대한 건물에서 오로지 전시된 작품들만 대면하며 고독한 밤을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는 때마침 서른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 ‘장소와 기호’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은 베네치아의 명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당대 최고의 도시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의 물품들에 관세를 징수하는 세관으로 쓰였던 건물을 20세기에 개축했다. 2007년, 베네치아 시는 약 30년간 방치되어 있던 이 건물을 재건축하기로 결정했고, 기존 건물의 높이나 넓이를 절대로 변경하지 말 것과 대리석 외벽을 그대로 유지할 것, 등의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걸고 재건축 작업을 공개입찰에 부쳤다. 자하 하디드를 내세운 구겐하임 재단과 안도 다다오를 앞세운 피노 재단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고, 세관 건물은 전통을 살리고자 한 안도 다다오의 세심한 감각으로 재탄생해 다양한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멋진 미술관이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가 된다는 것이다.” 아랍 문화 속에서 성장한 레일라 슬리마니에게 미술관은 서양문화의 발산물, 그녀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코드를 가진 엘리트주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미술에, 특히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바가 없는 작가는 오늘 밤 이 특별한 미술관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조금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 이 밤의 특별한 상황은 레일라 슬리마니에게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성찰과 자서전적 성찰을 촉발하고, 평소 잘 생각하지 않는 아버지 오스만 슬리마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로코에서 정치금융 스캔들에 휘말려 투옥되어 가족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드리웠고, 석방 후에 무죄로 판명되었으나 그로 인해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분이다. 이제 예술작품들과 함께 베네치아의 미묘한 밤으로 빠져드는 작가는 자기 자신, 감금에 대한 환상, 정체성,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의 인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고독을 선호하는, 내성적인 작가가 모로코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 관한 못다한 이야기를, 창작자로서의 삶과 글씨기의 절박함을 털어놓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텅 빈 미술관에서 슬리마니는 예술과 문학 사이의 다리를 만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명쾌하고 시적인 상념을 꿈 같은 분위기로 전달한다. 특히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오늘 밤, 특별한 도시에 있는 이 미술관에 자발적으로 감금되어, 오래전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한 이유를 고백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해 썼으며, 그들의 영혼 속으로 최대한 깊이 헤엄쳐 내려갔다. 나는 내 내면의 목소리와 음악, 내 머릿속을 통과하는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욕당한 사람들을 구해내고 싶어서 글을 썼다.” _ 118p 80년대까지만 해도 라바트에는 미술관이 아예 없었고 연극을 볼 기회도 극히 적어서 그저 책 속으로만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의 단편들, 여성들은 자유롭게 이동조차 하지 못했던 사회에서 ‘착한 소녀’가 되고 싶지 않아 밤이면 남몰래 집을 빠져나가 외부를 정복하고자 했던 욕구, 파리로 이주한 후 아랍과 서양의 중간에서 양쪽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긴장감, 그리고 자신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아버지에 관한 기억들이 그녀의 내면에서 솟아오른다. 동시에, 라바트의 집 마당에 가득 퍼지던 강렬한 꽃향기가 한밤중의 미술관으로 스며든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를 발견하는 일이다.” 짧지만 꽉 찬 이 책에서 슬리마니는 오랫동안 다져온 문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펼쳐낸다.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은 매번 문학적으로 확장되고, 그녀의 감각은 그녀를 삶의 본령인 글쓰기로 되돌려 놓는다. 지극히 고독한 직업이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자유의 공간인 글쓰기는 레일라 슬리마니에게 본능적인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고통스러운 명료함으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무엇이 자신을 문학에 그토록 집착시키는지를 탐구한다. 슬리마니에게 글쓰기는 거의 금욕적인 탐구이자, 삶과 세상에서 스며 나오는 아로마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느린 디캔팅 같다. 그녀의 독서 목록은 그런 요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그녀는 우리에게 감성과 그 깊이가 놀라운 인상적인 텍스트를 전달한다. 이른 아침 작가는 짧지만 꿈같았던 잠에서 깨어 꿈에서처럼 미술관을 떠나고, 그날 밤은 꽃향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덕택에 우리는 이 책을 만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