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문·사회과학 고등교육 및 연구 기관인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소속 연구자들의 공동 작업
『사회과학 하기』의 편집위원회와 필진 모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 속한 연구자들이다. 1975년 설립된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은 프랑스의 인문·사회과학을 대표하는 고등교육 및 연구 기관으로, 역사학·철학·인류학·사회학·경제학 등을 망라하는 약 800명의 교수와 35개 연구팀이 활동하고 있으며,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등 아날학파의 학자들을 위시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레몽 아롱(Raymond Aron),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등이 강의와 연구 활동을 해온 곳이다. 소르본 대학 모델이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다면,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은 상대적으로 독창적인 의제 설정과 연구에 가치를 두는 지적 성향이 강한데, 이 책에 참여한 필진과 그 연구 활동에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 선행 연구자 세대를 계승한 중견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를 통해 한눈에 살피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과학의 경향
◆ 프랑스 사회과학의 전통과 역동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연구 사례 모음
프랑스 철학이나 문학 이론과 달리 현대 프랑스 사회과학은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프랑스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사회를 바라보고 분석할까? 이 책은 현재 가장 활약하고 있는 중견 학자들의 글만을 모았다. 최근의 연구 동향 및 추세를 변화시키는 지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다뤄지는 연구 주제는 저마다 다양하다. 가령,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처음 나타난 ‘리베르탱’과 17세기 중엽 영국 사회에서 발생한 ‘레블러’라는 명칭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모욕적인 호칭이 정체성 수용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조명하며 역사학 고유의 인식론에 머물지 않고 언어학(사회언어학)과 사회학(상호작용 이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는가 하면(1장),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과 시청자의 관계를 관찰하며 픽션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수용해 체계적인 분석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2장). 또한 전통적인 비교 연구의 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분단 ‘한국’의 특수성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외부 연구자의 고민이나(7장), 프랑스의 홈리스 긴급 구호 기관인 ‘사뮈소시알’(Samusocial de Paris) 사례연구 과정을 통해 질적 연구란 특정 현상의 대표성보다는 한 사례에서 새로운 특성 및 요소를 더는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관찰하는 ‘포화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성찰을 엿볼 수도 있다(8장).
이처럼 『사회과학 하기』는 다양한 저자가 각기 다른 주제, 접근 및 분석 방식을 택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주제와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는데, 이는 단순히 여러 논문을 기계적으로 병치하고 이들 간 유사점이나 공통점을 찾아가는 의제 구성 방식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회과학적 문제 제기에 천착하는 방식을 편집 방향의 주된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서가 ‘사회과학 하기’(faire des sciences sociales)라는 제목 아래 각각 ‘비판하기’(critiquer), ‘비교하기’(comparer), ‘일반화하기’(generaliser)라는 부제를 달고 세 권으로 구성된 것도 이를 반영한다(한국어판은 프랑스에서 공부한 다섯 명의 사회과학자가 원서 각 권에서 고르게 추린 10편의 글을 한 권으로 엮은 편역서이다).
◆ 1960, 70년대의 거대 담론, 1980,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분과 학문에 갇힌 ‘좁은 시야’를 탈피하며 탐색한 더 정교한 사회과학적 성찰의 가능성
◆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설명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도록 이끌며 시민들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고 대안을 찾는 사회과학
1990년대 이후 연구 대상이 다양화되면서 방법론적·인식론적 변화가 동반됐고 새로운 개념 혹은 인식(‘탈국경’, ‘탈민족’, ‘탈식민지’, ‘간문화’, ‘관계’, ‘연결’, ‘접속’, ‘상호 교차’ 등)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와 더불어 연구 관련 교류 지역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지식의 생산, 교환 체계 및 수용 방식에 새롭게 접근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폭넓게 형성되었다. 하나의 분과 학문, 학파, 그룹, 기관 등에 천착하는 경향은 많이 완화되었고, 학계 내부의 경쟁과 대립 구도도 상호 개방적으로 변했다. 『사회과학 하기』라는 공저 자체가 많은 프랑스 사회과학자가 오래전부터 공감해 온, (이른바 프랑스 사회과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식된) ‘좁은 시야’를 탈피하려는 노력을 반영한 결과물인 셈이다. 따라서 수록된 글들은 순수한 이론적 담론에 머물지 않는다. 여러 연구 분야에서 ‘현장’(fields)을 중시하는 접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여기서 획득한 경험적 분석 결과를 통해 개별 주제에 내재한 독창적인 측면과 사회과학을 관통하는 일반적인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고 있다.
이는 비판이 아니라 비판‘하기’, 비교가 아니라 비교‘하기’ 그리고 일반화가 아니라 일반화‘하기’, 더 나아가 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 ‘하기’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하기’라는 표현은 경험적 연구와 사회과학적 성찰에 방점을 둔다는 의미로, 이론적 전망을 거부 또는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혹은 현재의 주요 저자와 저서를 끊임없이 상기·소환·원용하면서 연구자 자신의 연구 과정을 비판적으로 되짚어 본다는 뜻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은 개론서, 입문서 혹은 교과서가 아니며, 세 가지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분과 학문에 내재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법론과 인식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하는 학제 간 연구의 사례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현상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설명을 담지하고자 했던 1960, 70년대의 이른바 거대 담론뿐만 아니라, 1980,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에 함몰된 무분별한 상대주의적 담론을 동시에 되짚어 살핌으로써 더욱 정교한 사회과학적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기, 프랑스 사회과학의 새로운 흐름을 담은 이 책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자신의 연구와 학문 하기를 되돌아볼 계기를 제공하는 한편,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설명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도록 유도해 시민들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고 대안을 찾는 데 사회과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제1장 역사 서술 범주의 비판적 사용을 위한 고찰
― 장-피에르 카바이예 / 김태수 옮김
역사학자 장-피에르 카바이예는 이 글에서 원전 또는 사료에 내장된 범주화 투쟁을 역사적 실체의 구성 요소로 보고 이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역사적 실체는 본질적으로 개인과 집단 간에 언어를 통해 표출되고 작동하는 갈등적 관계(또한 협상과 타협)의 산물임을 밝힌다. 저자는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처음 나타난 ‘리베르탱’, 그리고 17세기 중엽 영국 사회에서 발생한 ‘레블러’라는 명칭을 둘러싼 논쟁을 구체적인 연구 사례로 제시한다. 첫째 범주(리베르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원전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고 논쟁적인 이 범주의 사용을 추적하면서 물신화된 범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둘째 범주(레블러)를 다룬 연구에서는 앞의 경우에서 드러나는 현재적 현상, 특히 모욕적인 호칭이 정체성 수용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역사학 고유의 인식론에 머물지 않고 언어학(사회언어학)과 사회학(상호작용 이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저자의 분석은 본질적으로 성찰적이다. 이를 통해 역사학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범주의 존재와 내용이 과거 갈등 상황에서 급조되어 갈등적 상호작용에 사용된 명칭이라는 사실을 잊는 경향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를 제시한다.
제2장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드라마 주인공들
― 사빈 샬봉-드메르세 / 손영우 옮김
사빈 샬봉-드메르세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미디어 비평을 통해 사회과학 방법론인 ‘비판하기’에 대해 설명한다. 이 글은 ‘드라마와 정치’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이목을 끈다.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 분석이나 드라마 비평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드라마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오랫동안 학계에선 시청자들이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명제를 내세우며 픽션이 현실에 가져온 영향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런 연구 자체를 가로막아 왔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걸친 의복이나 액세서리 등이 현실에서 ‘유행’이 되는 것에 익숙하다. 저자는 시청자들이 드라마 주인공의 생활 스타일, 취향뿐만 아니라 언어와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나아간다.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미디어와 (비록 허구일지라도) 예술 작품을 병적일 만큼 극도로 경계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픽션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수용해,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제3장 왕은 친족이 아니다: 아프리카 탈식민 국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책무
― 조르조 블룬도 / 이진랑 옮김
이 연구는 세계화와 더불어 국제적으로 표준화되어 가는 사회정치적 가치 중 ‘좋은 협치’라는 개념이 아프리카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세네갈과 니제르의 삼림 서비스 업무 과정을 관찰하면서 이해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를 위해 협치의 서구적 개념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국제 개발주의자들과 아프리카 토착 문화에서 내생적으로 생성된 지역 양식을 고려하자는 사회과학자들의 논쟁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해, 책무 실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민속지적 연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책무란 국가를 비롯한 공공 기관이 그들 활동의 과정과 결과에 책임을 지고 시민에게 투명하게 보고하고, 수정하고, 정당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화는 이미 경제 영역을 넘어 개인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영역까지 닿은 지 오래다. 이 연구는 여기서 오는 ‘세계화’와 ‘지역화’의 갈등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국가 인류학의 재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공 영역의 부패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할 여지가 있지만, 이 글은 어떻게 미시적인 영역이 한 국가의 문제로 확장되며, 어떻게 국제적인 문제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연구이다.
제4장 세계화된 중세?: 서양의 동학을 이끈 초기 원동력에 관한 서술
― 제롬 바셰 / 김태수 옮김
제롬 바셰는 이 글에서 세계사를 관통하는 사회역사적 구조 및 진화의 동력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이 영역에 대한 기존의 대립된 두 관점, 즉 서양 중심주의적 근대화 담론과 포스트 식민적 해체주의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는 통로를 밝힌다. 저자는 시선을 신대륙으로 우회하면서 중세 서양에 대한 탈중심적 시각을 확보해 서양의 지구적 팽창의 동학을 일으킨 추진력을 탐구한다. 특히 저자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을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르네상스의 요술 지팡이질과 연계된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신대륙의 운명을 중세 유럽에 묶는 기점”으로 파악하며 이를 봉건-교회적 세계화로 개념화한다. 즉, 근대 유럽의 팽창적인 동학은 이미 중세 시대에 준비되었으며 이 동학의 추진체가 13세기에 서유럽에서 완성된 교회 보편주의 ― 교회의 형식을 띤, 하나의 사회역사적 세력으로의 기독교 ― 임을 밝힌다. 이런 방법으로 저자는 서방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 “기독교의 교회적 구조화”를 정교하게 분석하면서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단순히 “종교 문제”로 치부된 영역에서 서양의 동학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제시한다.
제5장 법, 역사, 비교
― 파올로 나폴리 / 김성현 옮김
법학에서 비교적 방법론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다른 학문처럼 법학에서도 이런 접근은 결국 보편성과 개체성의 관계, 즉 개별 사례들을 통해 보편적 원리를 향해 나아가는 귀납적 방법과는 반대로 보편성으로부터 개별 사례들을 설명하는 연역적 방법의 문제와 연결된다. 저자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교 방법의 발달 과정을 특히 교회법과 세속의 법 이론과 실무에 관련된 쟁점들을 추적하면서 설명한다. 저자는 귀납-연역의 문제뿐만 아니라 비교를 수행할 때 비교 준거들의 구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정체성, 학문적 관심과 실무적 관심 간 이론적·실용적 시각의 대립, 나아가 법의 수용과 전파에 대한 연구에서 비교적 방법이 직면하는 문제들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면서 주요 쟁점을 분석한다.
제6장 비교 연구와 문화 교류에 관한 사례연구
― 지젤 사피로 / 이길호 옮김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비교 연구의 중요성이 주지의 사실이라면, 비교 가능한 개별 연구 대상의 구상과 접근 방식의 선택은 고스란히 학자들의 몫이다. 따라서 지적으로 무장된 비교 연구를 실행하고자 한다면, 본질주의적 시각, 민족주의적 태도 또는 몰역사적인 접근 등에 함몰된 방법론적·인식론적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연구 대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의 특성뿐만 아니라, 관련 행위자들 간 구조적 관계의 생성 및 발전 과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전망에서 저자는 ‘번역’이라는 구체적 영역에서 관찰 대상과 분석 요소를 재구성하고 다양한 차원에서 경험적 비교 연구 사례를 보여 준다. 우선 거시적 차원에서, ‘시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번역물의 흐름에 나타난 개별 관찰 대상들(국민국가 및 언어권) 간 상호작용과 구조적 관계를 비교한다. 주요 분석 대상은 국내시장의 세계시장 편입 정도, 국내시장 간 비교(시장 규모, 수출, 규제, 지원 정책 등) 등이다. 한편, 거시와 미시 사이의 중위적 차원에서는, 장(場)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러 나라의 출판물 생산 구조에서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하며, 연구 초점을 ‘수입’과 ‘수용’에 둔다. 끝으로 미시적 차원에서는, 관련 행위자들이 취하는 선택들이나 전략들을 비교하는데, 이때 이들이 살아온 역정과 성향을 다양한 구조적인 변수와 함께 분석한다. 상호 보완적인 이 세 가지 수준의 비교 연구에서 동원된 여러 접근 방식과 개념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우선, 양적 방법, 질적 방법, 인류학적 방법 등에 근거한 다양한 경험적 분석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관찰 대상에 내재된 복잡한 구조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비교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역사적인 접근은 개별 장들 또는 행위자들 간 구조적 관계가 어떻게 다양한 시간성에 따라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예컨대 세계 번역 도서 시장에서 중심부와 그 고유한 작동 원리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세계화 시대에 대응하는 행위자들의 전략은 단기적인 관점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도서 출판 장들 간 역사적 비교는 중기적인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제7장 ‘한국’ 연구와 사회과학: 분단된 두 ‘한국’에 대한 비교 연구의 다면성
― 발레리 줄레조 / 이길호 옮김
지리학자이며 ‘한국’ 관련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저자는 이 글에서 지역연구와 학제 간 연구가 어떻게 암묵적 비교 연구로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면서, 이런 연구 방식의 가능성, 형태, 성격 그리고 그 결과를 되짚어 보려 한다. 지역학에서 암묵적 비교 연구는, 관찰자가 ‘현장 중심 연구’를 진행하며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 획득한 이론과 시각을 연구 대상 지역에서 통용되는 가치나 지식 체계와 ‘교차’시킬 때, 그리고 동일한 대상 또는 범주를 여러 분과 학문이 만나는 공동 연구를 진행할 때 주로 이루어진다. 이 같은 연구 방법은 (관련 용어 번역의 한계와 오류, 공간 및 시간의 착오, 서구 중심주의, 문화주의 등에 따른) 다양한 지적 편견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기존의 여러 시각(남북한 각각의 입장에서 바라본 남한과 북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점이 있다. 연구 대상으로서 ‘한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단일 공동체에서 오늘날 두 개의 사회로 분단된 채 존재하는 남북한을 포함하는 ‘한국’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고, 바로 이런 특수성 때문에 전통적인 비교 연구의 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남북한 간 정치적 화해가 시도된 이른바 ‘햇볕 정책’ 기간을 거치면서 그동안 비교 연구가 불가능했던 일부 분야(경계선, 공간, 도시 개발 등)에서 학제 간 공동 연구가 가능해졌다. 결국 오늘날 국내외 정치적·사회적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변화(분과 학문 간의 장벽 완화, 다국적 공동 연구 발전)에 따라 비교 연구의 중요성이 더욱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분석과 서술에서 분명한 관점을 요구하는 ‘한국’ 관련 연구는 여전히 다양한 비교학적 도구를 동원하고 실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제8장 어떻게 일반화하는가: 긴급 구호의 문화기술지
― 다니엘 세파이 / 이진랑 옮김
이 글은 질적 방법론, 특히 문화기술지적 연구가 어떻게 일반화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연구 과정을 ‘사뮈소시알’이라는 프랑스 긴급 구호 기관의 사례연구를 통해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연구 방법론의 논쟁에서 질적 연구의 과학성에 대한 문제는 늘 제기되었다. 그것은 우선 과학이 추구하는 일반화는 대표성에서 나온다는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질적 연구가 추구하는 것은 특정 현상의 대표성보다는 포화성, 즉 한 사례에서 새로운 특성 및 요소를 더는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관찰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일반화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이론적 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문화기술지적 연구가 현장, 즉 현실에서 시작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일반화에 기여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프랑스 사회학자의 이 기나긴 연구 여정을 살펴보며 사뮈소시알이라는 특정 기관의 사례연구가 그 포화성과 일반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긴급 구호의 문화기술지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긴급 구호’라는 미시 사회학적 주제로 시작해 ‘사회복지 정책’이라는 한층 거시적인 정책 연구를 거쳐, 다시 ‘사회적 돌봄 작업’을 수행하는 현장의 주체들에게 기여한다.
제9장 집단 결정과 집단의 결정
― 필리프 위르팔리노 / 손영우 옮김
이 글은 집단 결정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과학에서 쓰이는 일반화 방법을 설명한다. 저자는 일반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 일부분이나 한 측면을 분석해 그것을 전체로 확대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현상들에 대한 규정과 이에 대한 비교를 통해 여러 사건이나 여러 대상을 하나의 현상군으로 묶어 내는 방법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집단 결정과 관련된 일반화를 시도해 본다. 특히 집단 결정과 혼동해 흔히 사용되는 다른 개념들, 즉 협상, 공정한 분배, 집단의 결정이라는 개념들과 구분하고, 현실 속에서 결합되는 현상을 분석한다. 방법론으로서 일반화 연구뿐만 아니라 갈등, 협상, 집단행동을 연구하는 학생들 및 연구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글이다.
제10장 순수한 추상과 단순한 일반화의 경계: 정치경제의 재구성에 있어서 일본이 주는 교훈
― 세바스티앵 르슈발리에 / 김성현 옮김
여러 사회과학 전공 중에서도 경제학은 가장 엄격하게 과학성을 주창하는 전공일 것이다. 경제학의 과학성은 특히 가치중립성과 고도의 추상을 통해 뒷받침된다. 그런데 경제학의 과학성 집착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경제적 현실보다 이론을 더욱 중시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일반성으로서 이론이 개체성으로서 현실을 압도하며, 이론에서 일탈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은 일종의 예외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 주류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일본 경제의 약진은 보편성을 고수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는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요인이 아닌 문화적 특수성을 변수로 끌어들여, 서구의 경제와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모델로 일본 경제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 뒤 일본의 장기 불황을 설명할 때는 또다시 주류 경제로부터의 일탈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특정한 이론이나 모델에 입각한 억지스러운 일반화는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이 글에서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그릇된 일반화를 일본의 정치경제 설명의 변천을 통해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서 이론 중심의 접근보다는 경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구체적인 배열과 조정의 분석을 통한 일반화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