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한 줄기 연기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투명한 망령에 매달려 발버둥 치고, 헛된 기대를 품는다. 그리고 거기에 삶의 죽음이 있다. - 펠릭스 발로통
자크 베르디에. 28세. 나는 개인적인 동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부모도, 아이도, 친구도 없다. 누구에게 진 빚도 없고 내게 빚진 사람도 없다. 내 책상 서랍에 금화 천 오백 프랑과 지폐 오천 프랑, 그리고 유가증권과 채권을 남겨둔다. 나는 이것을 공공 구호 기관에 전달한다. 나는 공동묘지에 묻히길 희망하며 존경하는 경찰서장께서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확인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오직 경찰서장만 볼 수 있도록 내 책상 위에 봉인된 봉투가 놓여있다. 그 안에 든 내용물은 그가 원하는 방식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 p.12
“네가 날 밀었어! 그래, 네가 날 밀었어…! 일부러!”
나는 화가 났다.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어. 나는 네 손을 느꼈어!”
아무리 반박하고 애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문이 퍼졌다. 나는 사랑스러운 벵상을 강으로 밀어버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으로 남았다.
--- p.24
나는 이 사건에서 내가 한 일을 잘 알고 있었고, 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달랬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아! 내가 고의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 p.29
“자, 얘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라뇨?”
“네가 친구에게 독약을 건넸다던데?”
“아니요!”
“녹색 가루를 상자에 담아 주지 않았다고?”
“녹색 가루라뇨…! 아, 그거요? 네, 맞아요, 새장을 새로 칠한다고 해서 조금 주었는데…. 무슨 일이죠?”
--- p.36
가엾은 소녀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반쯤 열린 블라우스에서 우스꽝스럽고 도톰한 작은 쿠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내 쪽으로 굴러왔다. 나는 마치 역겨운 동물을 쫓아내듯 그것을 밀어냈고 혐오로 가득 찬 내 눈빛을 느꼈다. 어안이 벙벙해진 잔느는 처음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팽창하더니 이내 사색이 되었다.
--- p.82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안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왜 안 되는지, 말해주세요.”
“당연히.”
“네?”
“그뿐이에요.”
“절대로?”
“절대.”
--- p.117
나는 집으로 다시 들어와 그녀가 없는 차가운 공간 속에 홀로 남아 책상 앞에 앉았고 〈12세기 프랑스 조각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 위에서 마치 아이처럼 울었다.
--- p.150
그러한 유산의 짐을 최초로 짊어진 조상이 누구인지 찾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수탁자이자 재앙의 전파자인 나는 불가해한 법칙에 귀속된 형태로 자신을 달구고 있었다. 이후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 질 것이고 나의 성을 딴 사람들은 영속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백한가!
--- p.179
분명, 나는 누구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이제 삶을 마감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을 논할 필요는 없다. 스물여덟 살에 죽음을 받아들인다. 불운한 나날들에 미련은 없다. 어쨌든 오직 나 자신의 결정에 따라, 지급 기한이 돌아온 듯 어느 아름다운 저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내게 고결한 행위이자 모든 과오를 벌충할만한 행위로 보였다. 누가 알겠는가, 이토록 사악한 나의 이름이 영예로운 빛으로 둘러싸일지. 그때 발에 밟히는 모래 소리에 생각이 뒤엉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내 책임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까짓것,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 p.248
이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그녀와 같은 물질인 나는 마침내 무해하고, 무력한 상태에서 중력과 화학의 법칙에 따라, 공평하게 육체를 다스리고, 뒤섞고, 중화시키며, 응고시키거나 분배하는 확고부동하고도 태연한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