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세기 전, 당시 국제관계의 무게중심이었던 유럽의 정치가들은 혁명적 격변을 겪고 난 뒤 한자리에 모였다. 프랑스 혁명은 그때까지 유럽 국가들에서 정치적 권위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왕권의 신성함이라는 원칙에 치명적이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가했으며, 그에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의 국제 체제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본서는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후과後果, 자신이 대표하는 나라와 그 대외정책의 목표, 구 질서가 무너진 잔해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하는 데 기초가 될 원칙들을 다루는 지난한 임무를 맡았던 정치가들에 관한 연구다. 그들은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니, 승전국과 패전국이 공히 정통성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원칙에 기초한 유럽의 균형상태를 수립했고, 그 원칙을 명분 삼아 유럽의 전반적인 평화가 한 세기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세계는 본서가 서술하고 있는 세계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캐슬레이와 메테르니히의 시대에 강대국들은 저마다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신빙성 있는 전쟁 위협을 가할 수 있었고, 서로 상대적 힘에 변화를 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훨씬 더 큰 파괴력을 가진 무기의 확산으로 인해, 강대국들 사이에서 통상적인 국가의 정책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에는 외교서한이 수신자에게 당도하기까지 수일 내지 수 주가 걸렸고, “궁정외교”는 대체로 이러한 통신수단의 우아한 속도에 맞추어 업무에 임하던 지성인들men of letters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기술 덕분에 의사소통이 즉각적인 것이 되었고, 어떤 때는 출처조차 불분명한 국지적 충격이 전 세계적 사건으로 비화하는가 하면, 정책은 때때로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는 데 애로를 겪게 되었다. 당시에는 국제 체제가 북대서양 지역의 국가들과 그들이 소유한 해외의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많은 신생국과 재탄생한 국가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세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G-20 정상회담,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주최한 것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직면하는 도전은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에게도 낯익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로 상이한 경험을 지닌 국가들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정의롭고 정통성이 있는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일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21세기의 국제질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다양한 관점과 열망을 서로 이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공통의 구조 속에 기존의 강대국들과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들을 함께 아우르고, 더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 과거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수락한 국제질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태평양 공동체를 수립하자면, 적어도 본서에 등장하는 정치가들이 지녔던 것 못지않은 정도의 선견지명과 창의성이 필요할 터이다. 그들을 배출한 국가들은 유럽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오늘날 아태지역의 정치가들은 광범위한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수립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동란의 충격에서 영감을 얻어 상호자제의 공동원칙을 확립하였지만, 오늘날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기 이전에, 부분적으로 그들의 통찰력에 기대어 행동해야만 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한가운데,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위대한 과업들 한복판에 한국이 위치한다. 한국은 역사, 지리, 국가정책으로 다른 모든 주요 강국들과 연계되어 아시아에서 벌어진 여러 격변으로 인하여 균형에 맞지 않을 만큼 크게 피해를 겪었고, 이후의 재건 과정에서도 국가의 규모를 초월하는, 큰 기여를 했다. 본서가 처음 출간된 이후 수십 년 사이에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저개발 국가에서 주요한 모든 국제적 논의의 장에서 의견을 존중받고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이 이제 전세계에 미치는 나라로 변모했다.
숙련된 외교관이자 학자인 박용민 참사관은 한국의 독자들이 국제체제의 전환을 겪은 다른 시대의 교훈을 궁구窮究할 수 있도록 돕고자 이 책의 번역을 떠맡았다. 모쪼록 독자들이 이 책의 지면에서 영감을 얻어, 발전과 평화를 위한 새로운 국제적 과업에 저마다 자신이 기여할 바를 발견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헨리 A. 키신저
---「한국어판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