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짝을 이룰 만큼 그 주제가 로마서와 매우 흡사하다. 즉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약의 구원 교리를 올바르게 제시함으로써, 로마서와 더불어 교회 시대의 교리를 정립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책인 것이다.다만 로마서와 차이가 있다면, “로마서”가 “현 교회 시대에는 죄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갈라디아서”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그 구원이 유지되며, 행위로 구원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사도행전 15:1의 이단 교리(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음)를 반박하고 있고,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5:5의 이단 교리(행위를 통해 구원을 유지함)를 성경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즉 구원에는 어떤 행위의 요소도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 66권 중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장 좋아했는데, 그는 갈라디아서를 아내(캐서린)의 애칭인 “캐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자기 아내 대하듯이 친숙하게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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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믿는 신앙의 기초
“신앙”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곧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고 자신의 죄의 용서와 구속을 위해 오직 그분께서 흘리신 피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여기에 다른 것이 개입된다면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찬송가 작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에 세워졌다네.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가 서 있네. 다른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일 뿐이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핵심이다. 이 믿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롬 3:22; 10:12,13).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10장의 코넬료의 사건을 통해 베드로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것에 관해 분명하게 규명해 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니라(행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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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함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제시되었음에도 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3장을 시작하고 있다.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 이는 갈라디아서 1:6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헛된 미혹에 빠져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 여기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를 말한다(갈 2:5,14, 골 1:5). 그리고 순종한다는 말은 곧 이 복음의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한다(롬 10:16). 바울은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 받았는지 재차 묻는다(2절). 이 질문은 비단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질문만은 아니었다. 갈라디아 사람들, 즉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은 명확하다. 믿음을 들음으로써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무용하게 만들며 은혜로부터는 떨어져 나간 자들일 뿐이다(갈 5:2-4) 3절에서 바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서, 율법의 행위로 받은 구원과 의를 유지하려는 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은 비단 바울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있었고, 지금 이 나라 교계에서도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볼 수 있다. 구원받지도 못한 채,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그나마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과 그 의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하고 있다. 사탄은 이런 불안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이 결국,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로 주저앉아 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인치실 때(엡 1:13) 믿음을 통해 은혜로 시작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갈 6:14) 믿음을 통해 은혜로 지속하는 것이다(갈 3:11). 구원에 행위를 결부시키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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