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라의 논의는 주로 베단타 철학에 기반하고 있지만 기독교나 불교의 관점도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베단타 철학 자체를 다룬다기보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종교적인 것들을 싹 걷어내고 핵심적 논의만을 추출하여 현대적이고도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가장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증류 과정을 거쳐 원액을 뽑아내듯이 베단타 철학으로부터 핵심만 추출한 그의 논의는 기독교나 불교의 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지만, 어떠한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보다도 더욱더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동시에 어떠한 명상 지도자보다도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명상법을 제시하고 있다.
---「8쪽, "옮긴이의 말"」중에서
“나는 알아차린다”라는 경험은 곧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앎은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나기 위해 특정 방향으로 빛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도 스스로를 알기 위해 자신의 “주의attention”를, 즉 앎의 빛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태양이 빛을 어느 방향으로 보내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비추게 마련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이 앎의 빛을 어느 방향으로 보내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무언가에 대해 알게 될 뿐입니다.
---「57쪽, "알아차리기"」중에서
영화의 내용 때문에 스크린 자체가 요동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가 경험의 내용 때문에 방해 받는 일도 절대로 없습니다. 생각이 뒤흔들리고, 감정이 고통스럽고, 몸이 아프고,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는 이러한 경험 중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본질은 평온함 그 자체입니다.
---「61쪽, "알아차림의 본질"」중에서
우리들은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과 같은 경험의 내용물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모든 지식과 경험에 대한 알아차림을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의 배경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치 않는 알아차림의 단순한 경험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림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가 알아차림의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적인 모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대신 생각, 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들이 모인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77쪽, "우리 본질의 핵심을 살펴보다"」중에서
밝은 햇빛 아래에 있다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봅시다. 어둠 속에 있는 대상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긴장을 풀면 천천히 사물이 눈에 보이게 될 뿐입니다.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알아차림을 발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바로 알아차림 그 자체의 한정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무엇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알아차림을 더 가릴 뿐입니다. 명상이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96~97쪽, "뒤엉킨 알아차림 풀어헤치기"」중에서
알아차림은 우리의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이 알아차림의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알아차림이 대상적 경험을 알기 전에 알아차림은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이 외관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즉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을 알기 위해서, 알아차림은 스스로의 주의인 앎의 빛을 그 대상을 향해 비춰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앎의 빛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 115쪽, "애쓰지 않는 길"
알아차림의 본질은 순수한 앎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알며, 스스로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정수입니다. 이는 마음을 어딘가로 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집중하거나 통제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지요. 무엇을 수행하든 우리 본연의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는 본연의 존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121쪽, "애쓰지 않는 길"」중에서
“나의 경험을 알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든 지식과 경험이 알게 하는 앎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마음은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하면서 점진적으로 정제되고, 대상적 경험의 여러 층위를 넘나들면서 대상적이고도 제한적인 마음의 자질들을 점차 순화시킵니다.
---「136쪽, "내면으로 향하는 길"」중에서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온함을 얻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가라앉아야만 합니다.
---「167쪽, "알아차림의 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