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란 현대 중국의 성장 내력이므로, 역사를 읽는 것은 중국을 이해할 절호의 단서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찬합의 구석 한 칸’을 후벼 파듯 세세한 사실?사건을 가지고 끝까지 파고들기보다는, 각 칸의 틀을 잡고 있는 ‘찬합’ 그 자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생각할 수 있는 ‘읽는 방법’을 제안해 보려고 했습니다.
---「첫머리에, p.5」중에서
사람의 개성이 그 성장 과정, 이력, 인생의 결과인 것처럼 나라의 개성은 역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무엇이 그런 개성을 만들어 냈고, 그 개성이 어떠한 현상을 초래했는가를 풀어가고 싶습니다. 중국의 개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원 구조’입니다. 그 구체적, 역사적인 내용이 본문의 주제이지만, 여기서 그 취지를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해 두면 ‘쌍[對]의 구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사물을 크게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언행(言行), 허실(虛實), 상하(上下), 남녀(男女), 원근(遠近), 조야(朝野) 등 한어에는 쌍의 의미를 가진 숙어가 수없이 많습니다.
--- p.16
중국에는 ‘제국’이라는 한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어에서 ‘나라[國]’는 일정한 한정된 범위, 예를 들어 ‘조선국’이나 ‘일본국’처럼 제후가 영유하는 범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일본인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왕국’이니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는 ‘제국’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어에서는 ‘제국’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자가당착의 어휘입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천자와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천자는 전 세계(=천하)의 통치를 하늘에서 위임받은 존재이므로 ‘나라[국]’라는 글자가 뜻하는 ‘일정한 범위’라는 의미와 모순되어서입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범위는 전 세계여야만 합니다.
--- p.66
수를 건국한 양견과 당을 건국한 이연 모두 그 뿌리는 유목민의 선비족입니다. 그리고 두 왕조를 뒷받침한 군벌 집단도 유목민들을 뿌리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문제는 황제가 된 뒤 스스로 ‘한인’이라고 주장하며 뿌리를 바꿔버렸기 때문에 수를 한인 왕조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나 당이나 명백히 호족 왕조입니다. 수당의 정치에서 한인 왕조의 특징은 시종일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한인이라면 소극적이어야 할 ‘호한일체 체제’를 밀어붙였습니다.
--- p.142
과거는 관리 등용 시험이지만 시험 내용은 현대의 관리라면 당연히 그 능력을 검증할 전문 지식이나 행정 능력, 정치 수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인문계 문항, 더 정확히 말하면 전부 유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유교 경전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경전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직설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그밖에 시문과 소논문을 짓게 하는 시험 문제도 있었습니다...가장 기본 텍스트인 사서오경은 43만 자가 넘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면 이를 모두 암기하는 것은 물론 그 몇 배 분량의 주석서를 습득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시문이나 소논문을 쓰려면 역사서나 문학 공부도 필수적이었습니다.
--- p.195
주원장이 목표로 한 것은 ‘중화’와 ‘외이’의 변별이었습니다. 즉 몽골이 구축한 ‘혼일’의 세계를 중화와 외이로 다시 나누고, 외이를 소외하고 배제함으로써 외이로 더럽혀진 중화를 회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를 ‘화이의 변(華夷之辨)’이라고 합니다. ‘변(辨)’은 구분하여 차별한다는 의미입니다.
--- p.221
소수파인 청이 베이징을 점령하자마자 딱 한 가지 한인에게 강요한 것이 있습니다. 복종의 표시로 변발을 시킨 것입니다....얼핏 고압적으로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당시 청이 한인들에게 명령한 것은 이 정도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변발을 강요한 데는 인구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존재를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변발을 시키고 복장도 만주식 복식으로 바꾸라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만주인들은 열심히 주자학과 한자를 공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겉모습은 만주인이 되었지만 속은 그대로 한인이었는데, 오히려 만주인들이 한인에게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251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모순되는 개념과 제도인데, 어떻게 중국에서 모순 없이 성립되었고 또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이 모순을 모순이 아니게 만드는 열쇠는 중국의 사회구조에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중국 정권이 근대 이후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이원 사회구조’를 오히려 이용하여 경제발전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관민 일체’가 되어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민 괴리’를 받아들인 다음, 정치는 ‘사회주의’의 공산당 정권인 ‘관(官)’이 독재를 하면서 담당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자본주의)’는 ‘민간’에게 맡기는 분업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