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령은 늙음을 서러워하는 감정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뜻을 두고 다 이루지 못한 늙음, 둘째는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늙는 늙음, 셋째는 죽음에의 공포가 그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래서 억지로 노화, 혹은 늙음에 대해 거부해 보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늙음을 서러워하며 그 서러움을 노래하는 것이 인간 일반의 정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정복해야 할 원수로 보지만(고전 15:26), 노화, 즉 나이가 들어 가는 과정 그 자체를 극복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노화는 문제가 아니다. 노화를 경계하는 현대의 통속적 견해나 문화는 오히려 당황스럽고 건강하지 않은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화를 재촉하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탈무드는 그것을 네 가지로 보았다. 공포, 분노, 아이들, 악처가 그것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의 삶이다. 삶의 내용이다. 삶이 우리를 노화로 데려다준다. 하나님이 인간을 노화로 데려간다. 그래서 늙는 것은 막을 길이 없고, 늙는 것은 감사로 받아야 한다. 목사 역시 한 인간이기에 노화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로서의 목사는 함께 즐거움으로 그 길을 가야 함이 자신의 품위가 될 것이다. (…)
--- p.18
(…) 따라서 노년으로서의 원로목사는 꽃이고, 아니면 꽃이 되어야 한다. 꽃은 자신을 위해 있기보다 보는 이를 위해 있다. 꽃은 자신의 행복을 사출하여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미와 향기를 가진 꽃은 세상에 행복과 평화를 선사한다. 그런 꽃이 되는 것은 지도자가 가진 사명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쇠, 즉 늙고 쇠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로목사가 꽃으로 피고, 열매로 결정되는 것은 신앙의 극치 아닐까. 우리는 늙어 간다고 흥분할 필요는 없다. 꽃잎이 떨어진다고 장미 포기가 울부짖지는 않는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꽃이 피지 않거나 꽃이 못 되는 것이 문제이다. 꽃은 피어 있을 때도 좋지만 떨어질 때도 좋다. 떨어져야 꽃의 의미가 오는 것 아닐까? 그 식물의 종은 꽃이 떨어진 이후에 확정되는 것이니까. (…)
--- p.22
(…) 마틴 부버는 하나님을 제3자로 보는 것을 비판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장애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의 3인칭이 아닌 2인칭이다. 하나님은 나의 ‘그’가 아닌 나의 ‘당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눈 맞춤은 하나님을 더 이상 ‘그’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사랑이 머물고 머물러야 할 나의 그, 그의 나여야 함을 간과하지 말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 변죽에 둔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눈 맞추기가 안된다. 하나님과 눈 맞춤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원로목사는 육신의 눈은 비록 흐려져 세상과 사물과 사람이 멀어져 가지만 영의 눈은 밝아져 하나님께 대해 눈을 떼지 못하는 참된 예배를 누려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하나님께 눈을 맞추면 하나님의 미래가 보인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눈 맞춤이 성립되면 그의 나라가 보인다. 더 명료하게는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영광의 빛으로 다가온다. 죄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눈 맞추고 그만 믿고 서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옷자락으로 우리를 덮어 주실 것이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이사야가 경험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나타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쉐키나’가 아닌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 ‘카보드’이다. 하나님과 눈 맞추고 나갔더니 그곳은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
--- p.88
(…) 원로목사가 가질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들음이다. 세상은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소리를 가지고 내게 찾아오는 장(場)이다. 인간관계는 사실 대화로 성립된다. 나의 말이나 부름 없이, 내가 말을 걸거나 부르는 일 없이, 인간관계는 맺어질 수 없다. 이때 관계를 위한 대화의 본질은 진실한 응답 행위에 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이런 관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고립시키고, 더러는 사람이 자신을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풍조가 점점 심해져 가는 세상에 우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위해 대화해야 하고, 들어주어야 한다. 원로목사인 우리는 들어주는 사랑으로 우리 이웃들에게 무언가 주고 관계를 맺는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
--- p.129
(…) 하나님께 있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거기 구원의 그림이 있고, 거기 생명 그림이 있다. 거기 영광의 빛이 있고, 거기 노래가 있어 아름답다. 비록 우리가 걷는 진리는 고난이 있고 위험이 따르는 좁은 길이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가지면 아름답다. 인생 험곡에서 인내로 사랑이 성숙하고 슬픔으로 사랑이 승화되면 사랑은 더욱 아름답다.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진정한 사랑이 보인다면 그 사랑은 아름다워 모두의 기쁨이 된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우리 삶에서 고통은 때로 행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숨 쉬는 곳에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곳에서 나는 산다. 사랑은 내 영혼의 꽃동산이다. 천국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어 아름다운 사랑 동산일 것이라고 말해 본다. 사랑의 현장은 피가 흘러도 사랑의 결과는 은혜의 향기이다. 해가 빛을 비추는 것처럼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사람의 영혼의 가장 기쁘고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작용이기에, 사랑 없으면 어둡고 비참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타락은 바로 이 사랑, 이 사랑이 가진 아름다움의 상실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궁극적인 죽음은 어떤 모양으로도, 어떤 방향, 어떤 시각으로도 아름답지 않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사랑 안에 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아름다운 육체에서 출발하여 아름다운 일과 활동으로, 거기서 다시 아름다운 학문이나 지혜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아름다움 자체를 알고 누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랑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룰 것이다. (…)
--- p.158
(…) 혼자 있으면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자기 눈일 뿐이다. 그 눈으로 보아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사람이 제대로 보인다. 자기 눈과 자기 가치로 사람을 보고, 사람을 욕하고 비판하고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벗 됨의 실상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그러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두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원수도 친구로 보인다. 적대자도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안에서 가질 인생과 삶에 대한 긍정이 아닐까? (…)
---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