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현대사를 뒤바꾼 삼국평화고등학교 테러 사건에 대해 역사가 금수안이 기록한 내용을 옮겨 적었다.
---「일러두기」중에서
바야흐로 단군 이래 처음, 한반도에 평화가 싹트는 듯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더 큰 걸림돌은 삼국민들이 서로에게 가진 뼛속 깊은 거부감이었다. 동일한 한반도어족(-語族), 유사한 민족 구성에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안 그래도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세 나라가 여태 죽일 듯이 싸워댔으니 오해와 증오가 켜켜이 쌓여 있을 만했다. (……)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놓은 것이 미래 세대인 삼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 교육이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삼국평화고등학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권 제 일 남상濫觴」중에서
“내는 김희락이고.”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났다. 변성기에 목을 혹사시킨 소년이 흔히 가지게 되는 탁한 음색이었다.
“가야의 마지막 왕손이다.”
공식적으로 가야의 마지막 왕족은 9개월 전 삼국 연합군이 실시한 해적 소탕 작전에 의해 사망했다고 알려졌기에 그의 존재는 자못 생소했다. 학생 중 한 명이 가야라는 말에 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김희락이 소음을 낸 학생 쪽으로 힐끗 눈길을 돌리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인마들은 내 인질인데, 우리 요구를 안 들어주면 내일부터 한 명씩 죽일 끼다.”
학생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떤 울음은 비명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권 제 일 남상濫觴」중에서
그래서 삼국평화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문희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 일은 온전히 백제 고교 추첨 사이트의 시스템 문제로 생긴 사고였다. 교육청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와서는 이미 모든 학생들이 배정된 상태라 파주 시내 고등학교에는 이제 자리가 없다고 했다. 가능한 학교는 황은사에서 대중교통으로 편도 세 시간이 걸리는 서울에 있었다.
여문희는 고민하지 않았다. 애초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기숙사비, 식비, 의복비가 전액 면제에 신청하면 생활비도 나온다고 했다. 모든 싫은 기억을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편으로 여문희는 기대를 품었다. 삼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집안 애들이 모인다는 뉴스를 봤다. 다들 사회적 체면이랄지 받아온 교육이 있을 테니 희망컨대 무탈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그리고 지금, 그 난다 긴다 하는 집안 애들이 내일 죽을 사람으로 자신을 뽑았다.
---「권 제 이 난의爛議」중에서
여문희가 살던 파주 검안면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하나씩이었다. 지역의 모든 또래들이 같은 학교를 다녀야 했다는 뜻이다. 아주 끈끈한 우정이 가능한 환경이면서 아주 끈끈한 괴롭힘을 당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기도 했다. 긴 시간 여문희를 괴롭히던 폭력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 끝이 났다. 가해자 중 몇 명이 범람한 임진강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여문희는 부단히 애를 썼다. 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신라 애들이 자신을 보던 눈빛, 거기에 담긴 노골적인 적대심을 감지한 순간, 그때의 기억이 목덜미를 잡아챘다. 온몸을 깔아뭉갰다.
---「권 제 삼 조삼朝三」중에서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애들 몇몇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서울이라고 혔냐?”
분명 파주에서 왔다고 얘기했지만 대개 이런 식이다.
“시골에선 치약에 이름도 쓰고 그러냐?”
“안 써.”
“아직도 소 타고 다니는 거 아녀?”
“그만해. 내놔.”
“그만해. 내놔.”
학생들이 일부러 여문희의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며 웃었다.
“나 이런 사투리 알어. 영화에서 사기꾼들이 쓰잖여.”
여문희가 터질 듯이 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치약을 빼앗아 주먹 안에 숨겼다.
---「권 제 사 사지四知」중에서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이 참 대단했다. 죽음의 공포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나름대로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다. 국가 간의 미묘한 긴장감은 여전했으나 같은 나라 애들끼리는 가끔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고 새로 친구가 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속으로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지만.
‘왜 이렇게 조용하지?’
겁이 났다. 방정맞게 얘기했다가 말이 씨가 될까 봐. 영화에서 보면 바로 특공대가 투입돼서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내던데, 왜 이곳은 며칠이 지나도록 이렇게 고요한지. 혹시라도, 혹시라도 그들의 대단한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대통령과 국회의원, 왕과 왕비가 자신들을 버리거나 포기한 게 아닌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도 그런 두려움이 자꾸만 목을 조여와서.
---「권 제 오 득공得功」중에서
김유하가 시신에게 다가가 비틀린 사지를 다독이며 울먹였다. 해미소의 노골적인 시선은 아까부터 여문희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저 시체가 너였어야 해, 라는 저주의 말을 눈으로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정작 여문희는, 그저 지겨웠다. 모든 게 다 지겨웠다. 하지만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는 그 최소한의 동작조차 취할 기운이 없어서, 모든 감각기관을 방치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죽음이 여문희의 몸을 정면으로 통과해 지나갔다.
---「권 제 구 내홍內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