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문트 프로이트 이후 정신과 의사들에게 무의식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흔들림 없는 프레임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얼음에서 수면 위로 보이는 것이 의식이고, 수면 아래에 있는 더 큰 부분이 무의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략) 이런 거대한 무의식은 정신과 의사에게 존재의 바탕이자 흔들릴 수 없는 절대적 토대가 됐다. 하지만 ‘뇌 피질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나의 생각은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히 받아들였던 심리 현상 이해의 패러다임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과연 우리 뇌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p.14~15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랑스 신경해부학자 프란츠 갈이 인간의 뇌는 마음의 장기로, 대뇌 피질의 각 부위가 심적 기능을 주관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뇌의 한 가지 기능을 많이 사용하면 그 기능을 담당하는 대뇌 피질 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더 커지며, 각 부위의 크기가 커지면서 두개골에 혹(bump)까지 생길 수 있다. 쉽게 말해 뇌는 자비.창의성.슬픔 등 심적 기능과 관련되는 부위가 35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두개골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까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뇌의 신비가 풀리길 바라는 많은 사람을 흥분케 했다. 당시 고용주들이 채용 전 구직자에게 두개골 진단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p.25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지 못한 결과, 스스로 장님이 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을 많은 철학자가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한 열띤 토론의 주제로 삼았고,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물음으로도 이어진다. 과연 자유의지에 의한 내가 문제일까, 타고난 뇌가 문제일까?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케인과 같이 자유의지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각이나 행동을 스스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이와 달리, 18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배런 돌바크를 비롯해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의지와 행동을 비롯한 모든 일이 인과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모든 일은 앞선 일이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일어난 것뿐이다. 오늘날로 보면 인간의 행동은 뇌의 활동으로 설명될 수 있고, 뇌의 활동은 뇌 신경세포의 신호 전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론자들에게는 내가 문제, 결정론자들에게는 뇌가 문제인 것이다.
--- p.70~71
우울이나 불안 등 겉으로 보이는 정신 현상의 밑에는 인지 기능의 장애가 자리하고 있다. 집중력, 기억력, 공간 지각력, 현실 판단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의 다양한 인지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인지 기능은 특정 신경회로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리고 이들 신경회로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으며, 단백질을 구성성분으로 한다.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난 정신 현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원초적인 존재,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의 치료는 겉으로 보이는 정신 현상을 넘어, 인지기능을 개선하고 신경회로나 신경세포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등의 모든 단계와 연결되어 있다.
--- p.140~141
바둑 전문가들이 바둑을 두는 과정에서 판세를 파악하는 것은 상당히 전문가적인 기능이다.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두면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분석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 돌을 두는 연습을 통해, 점차 돌들이 놓인 모양만 보아도 판세를 판단할 수 있다. 이것 역시 패턴 인식, 전체적인 인식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일에 달인이 되면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모습이나 형태 등을 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를 ‘직관’이라고 한다. 바둑은 최고의 직관력이 필요한 과정으로,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함으로써 직관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라는 지금까지의 믿음이 깨진 것이다.
---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