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할아버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옆에서, 그저 당신 신념이 조금 많이 강하실 뿐 장인어른은 좋으신 분이야, 하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습다. 나는 아빠가 할아버지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아주 옛날부터 확실히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아빠는 원래 혼자서 착하고 고고한 척을 다 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아빠가 종종 쓰곤 하는 가면 같은 걸 아주 잘 파악한다. 피를 물려받은 딸이라 그런지.
--- p.10
할아버지는 우산을 자꾸만 내 쪽으로 씌우려 했다. 할아버지, 나 누비스 있다고! 나는 비 안 맞는다고! 빛이 나는 손목을 두드리며 소리를 쳐도 그래 그러냐, 하고 우산을 물렸다가는 30초도 되지 않아 다시 슬그머니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할아버지는 누비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상에 그런 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 p.19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다고?”
“금꽃길양로원.”
“어디 있다고?”
“저 멀리, 경상북도에.”
“얼마나 자주 찾아뵙는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주말마다. 아니 근데 엄마, 이건 좀 아니야. 내가 주말 내내 학원 뺑뺑이 도는 거 우리 반 애들은 다 아는데? 다른 애들이 담임한테 나랑 같이 학원 다닌다고 말하면 거짓말 뽀록 나는 거 5초도 안 걸릴 텐데?”
“……그럼 너는 화상으로 맨날 인사드린다고 해.”
“엄마, 근데 담임이 이런 것까지는 안 물어봐. 담임 나한테 별 관심 없어.”
“혹시 모르니까 외워 두고 있으라고. 그리고 강이나 다리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아니, 담임 입에서 그 얘기 나올 일이 뭐가 있어 진짜…….”
그러면 엄마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얘가 왜 이래, 환장하겠네! 하라면 해! 너 엄마 인생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지, 그치?
--- pp.28~29
퇴원하기 전날 한 번 더 수향 씨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염치없게도 그런 짓을 했다.
“나 젊을 땐 물 부족 국가라고 어지간히 광고했는데.”
“근데 지금은 물이 너무 넘쳐나서 문제잖아요.”
“그러게. 물이 하늘에서 내리지 않는 날을 본 적이 있어?”
샴푸 거품 섞인 물이 눈과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물이 턱 밑으로 떨어지길 한참 기다렸다. 당연히 본 적 없다고 말해야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수향 씨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저 같은 나이대 애한테 어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그런 거 물어보면 무슨 얘기 듣는 줄 알아요?”
“무슨 얘기?”
“노망났다고.”
--- p.56
학교에도 가끔씩 ‘사고’를 치는 애들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건 아무래도 그 애였다. 뾰족한 송곳을 들고 다니면서 ‘불특정 다수’의 손목을 찔러 경찰에 끌려갔던 애. 그러나 그 애는 소년원에 가기는커녕 전학이나 정학 처분도 받지 않았다. 여전히 어깨를 으쓱이며 학교를 돌아다녔다. 어린 나이에, 정신과 진료 기록이 참작되었으며 피해자들과 ‘충분히’ 합의를 봤다고 했다. 걔는 영리했다. ‘불특정 다수’라니. 말도 안 된다. 걔는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지대에서 그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용서받았고 없던 일이 되었다.
--- p.115
나는 아까 보았던 수화기를 들었다. ‘면회 시 불편한 점이 생기면 누르세요^^!’라는 문구 아래에 ‘접수처’라고 쓰인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걸 눌렀다. 뚜, 뚜, 뚜. 세 번 연결음이 울리고서는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소리쳤다. 여기 면회실인데요. 우리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말랐어요? 전화를 받은 이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왜, 우리가 굶길까 봐서? 그러더니 덧붙였다.
“부모님이 말씀해 주셨을 거 아니니, 여기 오시는 어르신들, 앞가림 제대로 되는 분들이 아니라는 거.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렇지.
노망났다고 했지.
--- pp.146~147
세상엔 어쩔 수 없이 힘들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 녹슬지도 침수되지도 않은 감각기를 가지고 태어난. 그들은 자신의 감각기가 느끼는 바를 적은 후 흐르는 물에 띄워 세상으로 내보낼 것이다. 종이에는 적을 수 없다. 비를 맞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쓰는 종이는 젖어 해지고 찢어지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종이배 같은 건 안 된다. 성여민이 하던 것처럼 누군가 버린 판자를 가져와서, 비닐을 씌워,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 p.186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결코 그 기준은 바뀌지 않았겠지. 변하는 건 자연이고 기준을 세워 서로를 줄 세우는 것은 인간이다. 비는 계속 내릴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많이 내릴 것이다. 이 비는 이미 이전 세대의 방관에 대한 천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웠듯 정말로 책임이 많은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이미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 누비스의 온갖 시스템을 이용하며 편한 삶을 살겠지.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리고 누비스는 또다시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낳겠지. 더 큰 천벌이 찾아오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계속 바뀌는데, 결국 잘사는 사람은 계속 잘살겠지.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