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출가한 자는 발길을 내디뎌 세간을 초월하였으면 마음과 몸을 속인과 달리하여 성현의 종자를 이어받아 융성하게 함으로써 마군(魔軍)이 두려워 떨게 하고 네 가지의 은혜에 보답하며 삼계(三界)를 남김없이 구제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분에 넘치게 승려의 무리에 섞여 있는 것이어서, 말과 행동이 거칠고 성글며 헛되이 신도의 시주에만 젖어서 예전에 행하던 처신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흐리멍덩하게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믿고 의지하겠는가!
---「67쪽, “위산대원선사경책-대원 선사가 경책하다”」중에서
또한 배움이란 본디 스스로의 성품을 닦는 데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겠는가? 도(道)는 삶을 온전히 함을 귀하게 여기니 세상의 쓰임이 되기를 바라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람들이 혹시 (나의) 뜻과 논리를 흠모하더라도 반드시 그 밖(의 내용)을 추천함도 필요하니, 마음과 정성을 돈독히 하여 기초에 근거하여 가르치되 뭇 서적들을 다양하게 주어 오묘한 종지를 깊이 있게 보여주라. 자비의 방[慈室]과 인욕의 옷[忍衣]은 잠시라도 떼어놓을 수 없으며, 큰 법의 보배가 있는 곳은 잠시라도 필시 그 자리에 도달하고자 해야 할 것이다.
---「133쪽, “설두명각선사벽간유문-설두 선사가 벽 사이에 남겨놓은 글”」중에서
내 일찍이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재주가 민첩하지 못함이 수치스러워 배움을 걷어치우는 자는 보았지만 음식이 다른 사람처럼 많지 않음이 수치스러워 음식을 걷어치우는 자는 보지 못했다. 음식을 걷어치우면 곧 생명을 잃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많지 않다고 부끄러워할 것이며, 학문을 걷어치우면 곧 금수나 토목과 같아질진대 어찌 반드시 재주나 지혜가 다른 사람만 못하다고 부끄러워하겠는가. 진실로 재주와 지혜가 남만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배우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음식이 다른 사람만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음식을 폐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지극히 어리석어 매번 재주와 지혜를 헤아려 보건대 다른 사람에게 미치려면 아직 멀었으나 음식을 걷어치우지 못함을 알기에 감히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162~163쪽, “고산원법사면학편-지원 법사가 배움을 권하다”」중에서
못된 벗 피하기를 마치 호랑이 피하듯 해야 하고 어진 벗 섬기기를 마치 부모 섬기듯 해야 하며 스승을 받듦에 예를 다하고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으며, 선행을 했더라도 스스로 자랑하지 말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속히 고치도록 힘써야 한다. 인의(仁義)를 지킴에 확연히 흔들리지 않고 빈천(貧賤)에 거처하되 즐거워함으로써 근심을 잊으면 자연히 재난과는 떨어지고 복록과는 모이게 된다. 어찌 관상을 보고 운명을 물음으로써 아첨하여 영달의 기회를 구할 것이며, 날을 선택하고 때를 가림으로써 막히고 어려운 운세를 구차히 면하기를 빌겠는가? 이것이 어찌 사문의 원대한 식견이리요! 실로 오직 속인의 망령된 뜻일 뿐이다.
---「250쪽, “고산원법사시학도-지원 법사가 배우는 이들에게 훈시하다”」중에서
어른이라 하여 후생들을 업신여김이 없어야 하며, 젊었다 하여 나이든 이들을 기만함이 없어야 하며, 재물과 영화가 있다고 남을 깔봄이 없어야 하며, 의기가 있다 하여 남에게 거만히 읍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착하지 못한 몸으로 애써 상대와 친하고자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착하고자 하여 도리어 악한 이를 미워하여 물리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조그만 능력으로 내가 옳다 일컫는 일이 없어야 하며, 조그만 견해로 다른 이의 그릇됨을 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중략…) 슬기롭게 불법(佛法)을 향해 가는 가운데 마음을 쓰되 티끌의 경계 위에서 자주 세속의 정(情)을 제거하라.
---「274쪽, “양고승칭법주유계소사-칭 법주가 어린 스님들에게 남긴 훈시의 글”」중에서
양개는 금생의 몸과 생명을 버리더라도 맹세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겁의 근진(根塵)으로 반야를 깨우쳐 밝히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모님께서는 마음으로 들으시고 기꺼이 버리시어 뜻으로 새로이 인연을 짓지 마시고 정반 국왕을 배우시며 마야 모후를 본받으십시오. 다른 날 다른 때에 부처님의 회상에서 서로 만날 것이오니, 지금 이때에는 잠시 서로 이별하는 것입니다. 양개는 오역죄를 저지르고자 부모공양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한 까닭에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라고 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모님의 마음에 이 자식을 다시는 기억하지 마십시오.
---「322쪽, “동산양개화상사친서-양개 화상이 어버이를 이별하며 올리는 글”」중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도를 깨치기는 쉽고 과거는 급제하기 어려우니, 무슨 까닭인가? 학문과 기술은 나에게 있으나 주고 빼앗는 것은 저들에게 있으므로 나의 소견으로써 저들의 소견에 합치시켜야 하기에 대단히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과거에 급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참선으로 진리를 구함도 나에게 있고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도 나에게 있으므로 나의 소견이 없는 자리로써 저 소견이 없는 자리에 합치시키는 것이기에 대단히 쉽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도를 깨치기는 쉬운 것이다.
그러나 참선하는 자는 많으나 도를 깨치는 자는 적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면 증득하여 들어갈 수 없으니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려운 것이다. 글을 읽는 자는 많고 급제하는 자 또한 많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견해가 계합하기 때문이다. 견해가 계합하면 추천하여 선발에 응하는 것이니 이는 어려운 가운데 쉬운 것이다.
---「364쪽, “개선밀암겸선사답진지승서-도겸 선사가 진지승에게 답한 글”」중에서
그대들이 여기에서 옛사람들의 말을 두루 살펴봄에 한 가지를 보아 천 가지를 깨닫고 붉은 티끌 속으로 들어가 큰 법의 바퀴를 능히 굴릴 수 있으면 모든 조사가 곧 그대이고 그대가 곧 모든 조사일 것이나,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개가 마른 뼈를 깨물고 소리개가 썩은 쥐를 쪼는 것과 같기에 쪼는 부리와 벌린 입술에 굶주림의 불길만 더할 뿐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분석하면 더러움과 깨끗함이 되고 나열하면 원인과 결과가 되고 판단하면 욕심과 생각이 되고 감응하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니, 깊이 빠져 표류하다 아득한 미래의 끝이 다하게 될 것이다.
---「399쪽, “무주영안선원신건법당기동승당기-무주 영안선원에서 새로 건축한 법당 기문과 승당 기문”」중에서
무릇 알기를 모름지기 원만히 알고자 한다면 저 밝은 눈을 가진 종사에게 돌아갈 것이요, 수행을 반드시 원만히 닦고자 한다면 총림의 도반에게 부촉할 것이다. 처음 마음을 일으킨 자가 박복해 친하고 의지함을 잘하지 못하여 견해가 치우치고 메마르며 수행이 게을러지고, 혹은 성현의 경계를 높이 밀쳐놓아 자기의 영명함을 저버리게 되니, 어찌 덕상(德相)과 신통(神通)을 알겠는가? 범부도 도를 깨달을 수 있음을 믿지 않게 된다.
---「527쪽, “권참선문-참선을 권하는 글”」중에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만약 정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과 같다면 불도를 이룬 지가 이미 오래일 것이요, 중생 위하기를 마치 자기 몸을 위하는 것같이 한다면 피차에 전념하여 힘쓸 수 있을 것이다. 남의 그릇됨과 나의 옳음을 보지 않는다면 자연히 윗사람이 경애하고 아랫사람은 공순할 것이니, 불법은 시시각각 눈앞에 드러나고 번뇌는 티끌마다에서 해탈을 이룰 것이다.
---「537~538쪽, “백양순선사시중-법순 선사가 대중에게 훈시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