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공부’란 자신의 개성에 맞는 공부를 찾는 것이다. ‘하고 싶다’는 욕구에 해당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해봐야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한 최소한의 욕구 충족이 가능하다. 말 그대로의 ‘그냥’이 필요하다. ‘그냥’ 하다 보면 계속해서 ‘그냥’에 머물기도 하지만, 공부에 나름의 목적과 방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때부터 ‘해야 할 공부’가 시작된다. ‘하고 싶은 공부’에서 ‘해야 할 공부’로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공부’는 공부를 자신에게 맞추는 것을 말하고, ‘해야 할 공부’는 자신을 공부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해야 할 공부’는 욕구의 충족을 넘어 변화와 성취를 목표로 한다. 자신을 원하는 목적과 목표에 맞게 변화시키려면 큰 노력이 요구된다. 산책은 가볍게 할 수 있지만, 높은 산을 오를 때는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 없이 오를 수 있는 산도 있지만, 해발 3,000m 이상의 산을 오르려면 고산병을 각오해야 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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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호소하는 공통된 마음의 상처를 간단히 표현한다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이다. 누가 나를 알아줄 것인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나를 알아주려면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밖에 없고, 자기를 이해하려면 타인이 거울이므로 타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나, 자기’를 알아주는 것이 공부라고 해서 그것만 이해한다면 주관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공부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균형을 잡아 가는 것이다.
--- pp.33~34
자신과 공부를 이해하는 길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나를 아우르는 ‘우리’에 대한 인식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우리’를 벗어난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입고 있는 옷과 먹고 있는 음식,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부 또한 우리 속에서 펼쳐진 사회문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우리’를 통해 배우고, 배운 공부를 우리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공부는 더욱 풍성해진다. 그러므로 나와 우리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명’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 p.42
페르소나를 방치하는 것은 오래된 가면들을 지하창고에 묻어두는 것과 같다. 에너지상으로 볼 때 ‘묵은 기운’, 즉 쓰고 폐기했으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의식체들이다. 다 썼다고 해도 나의 일부이므로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묻어두게 된다. 자신에게 필요해서 만든 의식체를 현실에서 쓰면 페르소나, 묻어뒀으면 그림자, 더 오랜 세월 묻어두었으면 ‘영(靈)자아’라고 말한다.
--- pp.68~69
자신이 원하는 바와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를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정말 중요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바가 정말 중요한 일인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위 세 문장이 같다고 여겨지는가, 아니면 다르다고 여겨지는가. 해답이 당장 떠오르지 않아도 된다. 세 문장의 답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냥 의문을 던지고 기다리면 된다. 천천히, 천천히 해답이 자연스럽게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림도 공부이며 수행이다.
--- pp.90~91
의식이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정신없어 보이고,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반면 의식이 안에 머물러 있으면 깊고 고요해 보이며, 단순명쾌하다. 의식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한 사람의 특성은 그 사람의 성향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논쟁이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의식이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고 횡설수설 두서가 잘 맞지 않지만, 의식이 안에 있는 사람은 발음이 뚜렷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의식이 산만하고 불안한가, 아니면 정돈되고 안정되어 있는가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의식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알 수 있다.
---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