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영국의 공자주의와 친중국 무드
이베리아 중국학과 이탈리아 선교사들의 중국보고의 영향 아래서 뷰캐넌의 왕권민수론과 폭군방벌론이 나오고 퍼채스와 마테오리치에 의해 이미 공자와 중국의 정치문화가 상당히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강단의 스콜라철학에 의해 가장 이단적인 것으로 취급된 베이컨의 경험론이 흥기하기 시작했을지라도, 17세기 초 영국의 지성계는 공자와 극동문화에 외관상 아직 ‘열광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영국인들에게 중국과 극동은 아직 급팽창하는 세계의 모자이크 속에서 한 조각의 이미지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 치세(1558-1603)와 스튜어트 왕조(1603-1714) 치세의 전기 영국에서 중국의 상업 전망과 견실한 통치에 대한 열띤 관심 외에 중국 이야기는 아직 특별히 감지할만한 그 어떤 유행도 타지 못하고 있었고, 상인들과 선교사들의 중국찬양 보고서들도 아직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17세기의 30년대를 넘어가자 흐름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실리적·타산적 중국 논평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와 저작들에 의해 점차 대체되었다.
· 17세기 초 영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1650-60년을 고비로 중국의 만리장성·도자기공예·가마우지고기잡이 및 중국의 평화적·안정적 통치체제에 관한 선교사와 여행자의 보고서들이 일치하면서 통치술과 관련된 중국의 명성은 영국에서 확고하게 정착했다. 그리고 이에 뒤이은 수십 년은 중국의 윤리도덕과 도덕철학도 유명해졌는데 중국 정치문화와 도덕의 두 가지 명성은 “공자라는 한 인물”에서 통합되었다. 영국에서도 공자를 알게 됨과 동시에 “현자 숭배(the cult of the sage)”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 영국의 중국보고서적과 공자철학서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지로부터 수입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17세기말까지도 대체로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저작들을 통해 중국을 알았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16-17세기에 중국에 관한 지식·정보는 거의 배타적으로 이베리아 · 이탈리아 · 프랑스 · 네덜란드 등의 탐험가·여행가·군인·상인·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부터 영국인들이 핀토, 페레이라, 크루즈, 라다, 에스칼란테, 발리냐노·산데, 멘도자, 마테오리치, 세메도, 마르티니, 나바레테, 니우호프, 마젤란, 쿠플레, 르콩트, 부베(Joachim Bouvet) 등의 수많은 중국 및 공자 관련 서적들을 부지런히 영역한 것은 중국의 정치적 위용과 문화·경제적 패권에 대한 영국인들의 제고된 의식과 각성의 표현이자, 극동아시아에서 상업과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의 경제적 번영과 연계하려는 집단적 호기심의 표현이었다.
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영국 철학자들은 특히 프랑스의 사상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루이 14세의 왕사 프랑수아 드 라 모트 르 베예(Fran·ois de La Mothe le Vayer, 1588-1672)는 1642년 자신의 저서 『이교도들의 덕성에 관하여』에서 공자를 “중국의 소크라테스”로 찬미했고, 저명한 동양여행가이자 저술가인 프랑수아 베르니에(Fran·ois Bernier, 1620-1688)의 전언에 의하면, 라 모트 르 베예가 공자를 알게 된 환희 속에서 “거룩한 공자님이시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소서!(Sancte Confuci, ora pro nobis!)”라고 외칠 뻔했다. 영국에 잘 알려져 있었던 라 모트 르 베예는 1642년 당시에도 보시어스·빈센트 등 영국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철학자였다.
물론 라 모트 르 베예 혼자만 공자를 찬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유럽 식자들에게 현자로서 공자는 훌륭한 치자와 계몽된 모럴리스트를 대표했다. 16세기와 17세기 초 여행가들은 엘리자베스 치세의 긴장과 스페인 필립 2세의 소란과 대비되는, 중국 광동·하문廈門 지방의 질서와 평온을 강조했어도 이것을 중국 치자의 도덕성과 연결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증가한 선교사들은 보다 항구적인 체류를 모색한 끝에 마침내 중국 내륙지방에서 장기체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공식적으로 얻었고, 이에 따라 이 중국 통치의 도덕적 성격을 보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올바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발견한 중국은 최근 만주족에 의해 정복되었을지라도 명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자철학에 정통한 선비계층에 의해 관리되었다. 만주에서 내려온 정복자들은 그들의 지배체제를 하루 빨리 토착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가장 중국적인 선비집단의 지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고, 또 기민하게 동원했다. 그리하여 강희치세에서 공자학습은 더욱 철저히 명대를 답습했다.
‘공자’라는 인물은 당시 영국과 유럽을 짓누르던 철학적 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딱 맞아 떨어졌다. 18세기 중국애호의 선구자 그룹에 속하는 라 모트 르 베예는 이교도의 화형식이 벌어진다면 이교도 소크라테스·플라톤과 더불어 공자를 구원하기를 원했다. 1613년 퍼채스의 공자 소개와 1615년 트리고의 『중국인들 사이에서의 기독교 포교』, 1643년 세메도의 『중국제국』 등 일련의 중국 관련 저작들의 보급으로 조성된 유럽의 공자찬미 흐름은 영국 최초의 이신론자 에드워드 허버트(Edward Ist Baron Herbert of Cherbury, 1583-1648)의 『진리론(De Veritate)』(1624)과 『속인들의 신앙에 관하여(De Religineo Laici)』(1645), 그리고 드라이든의 시집 『속인의 신앙(Religio Laici)』 (1682) 등 이신론적 저작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게 만든 한 배경이 되었다. 이들의 저작들이 조성한 영국의 이신론적 철학판도는 역으로 다시 공자철학의 대중적 수용에 지극히 유리한 지형을 조성했다. 또 당시 ‘공자숭배’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영국인들의 관심거리로 떠오른 호라티우스의 ‘중도中道(via media)’ 이념도 공자의 중용철학과 분명 매우 친화적인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