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는 세상을 떠나던 날,
순백의 종이에 시편 23편 1절을
여러 번 적어 내려가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 역시 이 귀한 말씀을 적어본다.
여러 번, 반복해서 적어본다.
난 이 고백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엄마는 이 말씀을 적어 내려가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는, 하나님이 엄마의 목자가 되어주시기를,
아니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절규하셨던 건 아닐까.
그래, 그건 절규였을 거다.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외친 절규.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이야말로
내가 드릴 수 있는 삶의 예배 아닐까?
그렇게 어머니는 시편23편을
써내려가며
이 땅 위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셨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어쩌면
이 한 문장에 당도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절 말씀은,
시편23편의 포문을 열지만
마침표가 되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시편23편 모든 구절의
총합과도 같은 구절인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은,
지금보다 더 무겁게
읽히고 음미되어야 한다.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3
우리에게 과연
진정 쉴만한 물가가 있을까?
어딜 가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장소에 가서도
내가 바라보는 나를 향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곤 한다.
그런 우리에게,
오직 주님만이
쉴만한 물가가 되시고
푸른 초장이 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빼어난 호텔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쉴만한 물가이고
푸른 초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은 그 자체로
‘넉넉하고 충분한 존재’이다.
주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주님 ‘그 자체’가 푸른 풀밭인 것.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4
우리는 때로 내가 서 있는 곳을
푸른 풀밭으로
착각하곤 한다.
그곳이 푸른 풀밭인 걸로
오해하는 것이다.
거기엔, 나의 욕망이 담겨 있다.
욕망으로 오염된 마음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볼 수 있는 눈을 흐리게 한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있는 곳이 황무지인 줄 모르고
풀 하나 없는
물 한 방울 없는 그곳에서
그렇게 생명을 잃어가는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푸른 풀밭인가,
아니면 황무지인가?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5
일상이 흔들릴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지루한 일상은
놀라운 축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
‘왜 이 일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 속에서…
이 흔들리는 일상의 원인 제공자로
우리는 하나님을 지목하지만,
그 원인 제공자를 향해 다시 손을 내미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곳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여길 때
우리가 투덜대며 내미는 손을
하나님은 힘차게 잡아주신다.
아니, 우리가 손 내밀지 않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신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는,
물리적 동행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주님에게는 힘이 있다.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건
주님의 힘과
주님의 마음을 경험하며 산다는 것이다.
든든하지 않은가!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6
우리는 광야를 지나,
물 한 모금 찾기 힘든 곳을
통과하여 기어코 도달한다,
여호와의 집에.
여호와의 집에 마침내 도달하여
고백한다,
“내가 이곳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그 고백은 우리가 평생 걸어가는
묵직한 발걸음의 맺음말 같은 고백일 것이다.
돌아보니 내 평생,
주님의 인도하심이 내 삶 구석구석을 살폈음을
그것은 세심하고 따뜻한 돌봄이었음을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흘러나올 수 있는 고백일 것이다.
한편 이 고백은,
우리의 하루와 하루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이기도 하다.
거친 하루를 보내고 나서 우리는
“주님, 감사합니다… 역시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던가,
그래서 시편23편 6절의 고백은
인간의 일생을 관통하는 고백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하루를 관통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
#7
시편23편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 자체로 완성형인 시편23편에 대해
감동을 느끼기는 쉬우나
그걸 품평하는 건 도무지 어렵다.
시편23편을 구성하는 여섯 구절은
돌고 돌아
서로가 서로를 견인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며 하루이므로,
우리의 순간이므로,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목자’라는 단어만이
시편23편의 명확한 흔적이다.
시편23편의 장대한 서사에서
‘목자’라는 존재만이 우뚝 서서
세상을 조망하고 있다.
다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고백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자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니 감사합니다.
다른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목자로 우리 곁에 계시니 감사합니다.
---「소재웅, 〈엄마의 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