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고가 거의 불가능한 그런 중에도 순간순간 “아, 아멘의 ‘o’만 나와도 살 것 같은데…….”라는 내면의 절규가 나왔다. 도무지 아주 간단한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왜, 기도를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았을까. 흔히 말하기를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 p.17
우리 가족들에게도 친지, 친구, 지인들에게도 그런 나의 회복은 그저 기적, 그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너 명씩 세 팀 정도가 나를 위해 수개월을 새벽기도와 중보기도로 응원을 해주고 있었다. 나도, 그들도,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라는 뚜렷한 체험을 한 셈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이처럼 드러내신다.
--- p.19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도 고가의 놀이방에 등원하고, 오후에 문화센터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방 창문을 활짝 열고, 넓은 침대에 누워 기분 좋은 햇빛과 바람을 즐기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40대엔 40평, 50대엔 50평으로 늘리며 살겠지. 그러면 60대에 60평, 70대에 70평? 어, 좀 이상한데……. 그때가 되면 아이들도 출가했을 것이고, 나이 들어 기운도 달릴 텐데 그리 넓은 아파트가 필요할까?’
--- p.24
아주 잠시 동안은 무슨 상황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며 데굴거리다가 침대에서 쿵 떨어져 나가떨어졌다.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스친 생각. ‘아!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나 보다. 이제 큰일 났다……!’
아직도 그때의 그 경험, 그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아마도 창조주 하나님께 나의 삶에 대해 드린 최초의 진지하고 본격적인 질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또한 역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창조주께서는 “옳지! 드디어 네가 내게 질문을 시작했단 말이지? 좋아, 이제 네게 답을 해 주리라.” 하셨던 게 틀림없다.
--- pp.25~26
내가 처음으로 만난 예수님은 ‘말씀’이었다. 본격적인 이성으로 사고하기 전인 어린아이였을 때 만난 그 말씀은 분명 나에게 그 뒤로도 항상 그리고 지금까지도 때로는 위로이자 평안이며, 주저앉아 울다가도 눈물 쓱 훔쳐내고 다시 일어나 나갈 수 있게 해준 가장 든든한 응원이었다.
--- p.32
마음이란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라고 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볼 수 없지만, 분명히 계시는 하나님.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들의 마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늘 동행해 주시는 그 사랑을 묵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 p.37
꼭 ‘성경’이라고 쓰인 책을 통해서만 예수님과 말씀을 만날 수 있다고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사랑, 그분만이 가지실 수 있는 사랑을 설명할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몸을 담고 발을 디디고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결국 도달해야 할 것은 예수의 마음, 즉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문자적인 성경 말씀만 읽고 골방에서 기도만 하면서는 그리 살 수 없다.
--- pp.37-38
폭풍우 치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한 상황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노련한 구조사가 우리를 인내하며 구해 낼 타이밍이 곧 되었으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만나야 할 최고의 구조사 예수님은 ‘말씀’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차하면 나를 구해 주실 최고의 구조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것이 비로소 나를 자유롭게 했다. 어려운 순간일수록 유난히 꽉 붙들어지는 말씀이 있어 자꾸 그 말씀이 떠오른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건져 올리고 계신다는 신호가 아닐까.
--- pp.44~45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도 비슷한 것 같다.
첫째, ‘힘 빼기’이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는 절대 물에 떠 올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다른 표현으로는 ‘포기’ 아닐까?
포기, 영어로는 Give Up. 나는 중학교 때 이 표현을 배웠지만, 요즘은 유치원만 다녀도 혹은 그보다 훨씬 전에도 배우는 쉬운 영어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재미있다. Give ‘Up’인데 ‘포기하다.’이다. 위로 주는 것이, 포기라니…….
다분히 창조주를 의식한 서양인들의 표현일 것이다. 위로 주는 것. 아래도 아니고 옆도 아닌 위로 준다…….
내 의지로,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내 계획으로, 그 어떤 나의 전략으로도 안 될 때 유일한 방법은, 그래, 위로 드리는 것이다.
--- pp.57~58
예수님이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하나님을 아는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진 존재로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이 다름 아닌 Give Up이었다니…….
마지막 호흡까지, 인간이란 존재의 모든 것을 위로 올려드리는 것, 그 단순한 일을 깨닫지 못해 그동안 ‘비운다는 것, 내려놓는다는 것, 포기하는 것’이 그리 막연하고 어렵게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 p.66
세상 것은 모두 악의 소산, 오직 ‘우리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들만 안전하고, 순결하고, 옳은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 안에서 지내다 보니 언젠가 나 역시 교회 다니는, 그것마저도 언젠가부터는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 vs ‘우리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의 이분법적 생각의 관계망 안에 갇혔던 것 같다.
--- p.7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나는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 그 확실한 가치, 진리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닻을 내리지 않으면 자칫 인생은 결국 공허함에 이르게 되거나 수단에 불과한 것들이 절대적인 목적이 되는 맹목, 즉 우상을 안고 불안해하며 끝내 흔들리다 끝내는 것이 된다.
--- pp.79~80
세상이 얘기해 주는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흉내 내다 넘어지고,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영생,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정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가 해야 할 세상의 것들도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곧 공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 p.83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리의 기원과 우리의 무수한 습성과 그 습성이 지어내는 결과들과 그리고 끝내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끝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보여주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도달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지도의 원천이다.
--- p.142
성경은 지도 중의 지도로,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이며 명확한 주석까지 달려 이 한 장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험한 인생의 험로를 항해할지라도 결국에는 우리가 안전한 땅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제작하신 상세하고도 상세한 지도이다.
--- pp.143~144
그저 주님께 받은 기쁜 소식, ‘얘야 내가 너를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 그러니 너는 가서 그 사랑을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평안히 전해라.’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보태지도 더하지도 말고 그저 내가 그 사랑으로 살아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우리가 맡은 복음 전도의 일일 것이다.
--- p.154
죄는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마치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처럼.
죄는 빛에서 떠나게 한다.
빛을 떠나면 춥고 어두운 곳에 거하게 되고
그러면 갈 곳을 몰라 헤매며 더욱 움츠러들게 된다
--- p.161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려고 예수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무셨고, 목숨을 바쳐 우리가 언제라도 그 빛 가운데 있을 자격을 획득해 주신 후 부활하고, 하늘로 가셨고, 다시 빛이신 뜨거운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 우리 안에 늘 함께하시며 온기를 더하신다.
--- p.162
이제는 안다. 우리가 살길은 진실로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길밖에 없다는 것을.
다른 길은 모두 허상이다. 결국 백척간두 벼랑 끝으로 이어진 길이다. 시간문제일 뿐 그 허상의 길로 질주하다가 끝내 돌이키지 않은 인간들의 말로는 예외 없이 사망이다. 비단 육신의 죽음 만이 아니라, 그런 생명 없는 길에서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몸을 망치는 일을 하며 산다면, 그것이 곧 사망이다.
--- p.164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빛 안에 거하게 함으로 능치 못할 일 없는 은혜 안에 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무렇게나 멋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양, 어린아이처럼 가장 힘이 세신 창조주에게 의탁하여 그 빛 안에 머무는 은혜로 말미암을 때, 불가능은 가능이 된다.
--- p.172
오늘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저 시각 시몬이었던 베드로의 모습은 아닐까. 겉으로는 믿는다고 말하고 행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 중심에 반신반의 혹은 불신이 자리 잡은 채 역할놀이 같은 행동을 행함이라 하고 있지는 않은가.
--- p.176
그렇게 우선,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청대로 살아내 보는 것이 우리가 오늘 다시 회복해야 할 공동체인지도 모르겠다.
꼭 한날한시에 한 장소에 모여 큰 소리로 뛰고 외치며 찬양을 부르고, 통성과 방언으로 울부짖으며 기도를 하고, 무슨 무슨 프로그램, 집회, 행사 등으로 촘촘히 짜여 옴짝달싹 못 할 만큼 시간에 묶여 왠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그런 곳이 진짜 교회는 아닌 것 같다.
--- p.185
우리, 예수님께 등 돌려 뒷모습을 보이지는 말자.
나약하면 나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분을 마주하자. 평생 그렇게 하는 것이 영생의 시작이다.
그러한 영생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풍성하게 나누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생생한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살아야지, 영원히 사는 데 지루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210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자신의 몸도 잘 돌보아 건강해야 할 의무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프고, 병들고, 다쳤을 때 주님의 기적으로 회복되는 경우도 물론 있고, 그 또한 큰 은혜의 증거이다. 선천적으로나 나중에 몸이 안 좋아져 아프거나 불편한 상태로 일생을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돌보아야 할 건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힘차고 기쁘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하나. 몸을 갖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건강을 돌본다는 것은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킬 하나님의 플랫폼을 돌보는 일과 같다.
--- p.224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건강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육신 자체가, 육신의 건강이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된다. 맹목적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건강은 먼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수님이 어디를 막 급하게,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니시면서 늘 분주하게 사셨다는 얘기는 성경에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급해 죽겠는데도 예수님만 혼자 느긋하신 장면이 등장할 뿐이다.
--- pp.224~225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인간이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빠져드는 과정과 결과에 도달하는 일과 참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 그토록 우상 섬기는 것을 금하신 이유와 우상에 빠진 자들의 참담한 결과를 성경 곳곳에서 이미 오래전 보여주신 이유도, 이미 오늘날 우리가 중독이라 부르는 이 시대의 우상숭배를 염려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pp.248~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