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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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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326g | 127*188*16mm
ISBN13 9788932118635
ISBN10 8932118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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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쓰는 것은 아버지와 낡은 타자기, 지하실에서 들리던 아버지의 경쾌하고 숙련된 타자 소리 덕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의 영웅이고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어느 때보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소설들은 아버지가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소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소설을 마무리한다. 화들짝 잠을 깬 아버지는 낡은 타자기를 보고 애잔한 미소를 짓다가 위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가 아이들을 깨운다.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글의 마지막 몇 단어를 검지로 두드리는 나는 턱수염 위로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92p. ‘지하실의 낡은 타자기’」중에서

형은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고 잡담도 할 줄 몰랐지만 우리는 형을 사랑했고 형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이 모든 일이 있기 전부터 우리는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형처럼 자라고 싶어졌다. 이제는 아버지도 형을 영웅이라 생각하시기 때문이었다. 형에게는 신념을 지킬 용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신념을 지킬 용기가 없다면 당신은 그저 빈 수레, 투명 인간, 속빈 강정, 바람만 잔뜩 든 영혼, 탁월풍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쨍그랑거리는 풍경, 아무 치수도 무게도 특징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135-136p. ‘신념을 지킬 용기’」중에서

나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을 가리키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싶다. 체스라는 단어라면 그 역할을 멋지게 해낼 것이다. 체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단어다. 경기가 끝나고 서로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세계 역사상 나보다 행복한 아버지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길고 험난한 역사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으리라.
---「149~150p. ‘체스 이야기’」중에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형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다. 결혼식 날 턱시도를 입은 형, 박사 학위를 받던 날 찰랑이는 졸업 가운을 입은 형, 아이들이 태어난 날 기뻐하며 작은 빵 덩어리 들 듯 아기를 들어 올리던 형, 심지어 죽기 전 몇 주 사이 수척한 얼굴로 환히 웃던 형이 떠오를 법도 하지만, 황혼녘에 우리의 자전거와 서핑 보드를 차고로 운반하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형이 가장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가 가장 또렷이 기억하는 것들, 우리의 기억에 가장 의미 있게 남아 있는 것들은 세상의 척도로 볼 때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절대 하찮지 않다. 그것들은 너무 거대하고 소중하고 거룩해서 우리에게는 아직 그것들을 담을 만큼 큰 단어가 없다. 그래서 그 근처에라도 가려면 암시나 비유의 힘을 빌려야 한다.
---「180~181p. ‘해변으로’」중에서

미사에 가기 위해 차려입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우리의 가엾은 어머니는 여러 시간 동안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족족 다림질하여 우리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준비를 시켰다. 사실 우리는 그런 관습에 대해 투덜대고 구시렁대며 불평하고, 프로 축구 선수들처럼 징징대고 끙끙대던 시절이 있었다. 나 역시 미사에 참석할 때 최고로 좋은 옷을 차려입는 습관은 버린 지 오래지만, 가끔은 좀 차려입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추억 때문은 아니고, 서핑 반바지를 입은 청년에게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눈치를 주려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런 관습은 존중, 겸손, 의례, 경의와 설명하기 힘든 관계가 있다. 어릴 때 나는 미사에 가려고 차려입는 것이 우스꽝스럽고 쓸데없는 공연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이 경외감 같은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위해 우리는 찬찬히 신중히 준비하여, 번듯하고 어엿하고 그럴듯한 모습을 내놓는다. 아직 우리가 꼭 들어맞는 단어를 찾지 못한 대상을 말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195~196p. ‘미사 참례 복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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