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 네 사람 모두 30대가 되었다. 퇴사한 날도, 그다음 진로도 각자의 특기와 성격에 따라 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만남의 주기도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오는 주기도 점차 멀어졌다.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를 여전히 친밀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 서로 삶의 맥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기 다르기에 서로를 궁금해하고, 또 다르지 않기에 서로를 공감한다.
--- p.9, 「머리글」중에서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살아가고 살아내는 우리 네 사람의 다양한 모양새를 그린 이 글들이 당신에게 안위가 되길 바란다. 때로는 굳건히 혼자서, 때로는 잔뜩 기댈 수 있는 것들의 실재에 흔연해하면서. 어떤 때에는 진창인 자신의 꼴에 절망하지만, 그런 꼴 안에서도 기어이 가능의 등불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 보편의 모습을 건너다보면서 말이다.
--- p.12, 「머리글」중에서
나에게 행복은 자려고 누웠을 때, 눈 떠서 들을 음악과 읽을 글이 기대돼 내일도 꼭 살아있고 싶은 마음이다. 글은 기쁘고 슬프고 고독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장 멋진 도구다. 나는 이것을 30년 전 엄마와 교환 일기처럼 주고받던 일기 쓰기 습관에서 처음 배웠고, 이후 글로 만난 관계에서 위로받고 위로하며 지속적으로 실감했다. 생명이 계속되는 복을 얻어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나는 읽을거리부터 찾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올해의 절기 프로젝트를 마감할 때까지는 반드시 다 같이 살아있고 싶다.
--- p.23, 「무해의 입춘 〈시작〉」중에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가슴을 치는 날이 잦았다. 어떤 생존본능이 작동한 걸까. 그만두고 도망치는 대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글을 쓰자고 했다. 친구들은 선뜻 그러자고 말해주었다.
--- p.32, 「진리의 우수 〈석가의 얼굴〉」중에서
하나로 연결된 이 길에서 코스의 시작과 끝에 의미를 부여한 채, 이 긴 거리를 정말 걸을 수 있느냐고 자신에게 재차 물었다. 끝내지 못할 거라면 시작조차 않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언제든 포기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자 두려운 마음이 잦아들었다.
--- p.38, 「예슬의 경칩 〈깻잎은 질기고 무에선 달큼한 맛이 난다〉」중에서
나의 안위가 흔들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열두 살 무렵이 떠오른다. 골대가 아닌 나에게로 향했던 공들. 비웃던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나. 술 취한 아빠의 발길질. 그저 앉아있는 엄마와 오줌을 지린 나. 깊이 남겨진 외로움과 수치심. 그 감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연민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이게 나의 섭리일까. 글을 마무리 짓던 2022년 4월 26일 서울은 이상기후로 기온이 섭씨 27도까지 올랐다. 다음날 평등 텐트촌에서는 때이른 모기를 만나 고생했다. 섭리를 거스르는 기온과 모기 앞에서 나는 나의 섭리를 다시 생각한다. 믿음을 배반하는 것들 앞에 선 자의 운명으로.
--- p.69, 「믿음을 배반하는 계절의 풍경에 부쳐 - 밤바」중에서
돌아온 계절, 여름의 문턱에서 어쩌면 다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극심한 통증을 두려워하지만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회사를 떠나면서 그 시절을 지켜준 동료들과도 헤어졌지만, 그중 누군가는 친구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억 속 소중한 존재가 되어 여전히 서로를 돌보고 있다. 아픈 나는 여전히 사랑받을 것이고 더욱 돌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어디 한 군데 아픈 곳 없는 불가능한 경지보다는 덜 아픈 삶을 갈구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 p.78, 「무해의 입하 〈돌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중에서
내 일상의 어떤 부분은 대가족의 시대보다 왜소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또 이만큼 왜소해진 생활이라야 맛보는 기쁨 같은 것도 있다. 작아져서 귀엽고, 드물어서 더 맛나고 소중한 것들. 퇴근해서 혼자 충전하는 시간의 해방감, 서울에서 강원도만큼 멀리 있는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 사랑 뭐 그런 것들.
--- p.94, 「진리의 망종 〈귀엽고 맛나고 소중한〉」중에서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그건 오래되고 어려운 문제다. 애인과 함께 산 지 오래된 한 친구는 ‘같이 산다는 건 오히려 멀어지는 방법 같다'라고 말했다. 함께 살기 위한 단계를 밟으면서, 친구의 말이 진실로 와닿았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칠 때 애인을 끌어안고서야 진정되는 마음, 잠시간 잊히는 고통, 혹은 이 고통 속에서도 이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존재한다.
--- p.106, 「예슬의 소서 〈네가 만든 콩국수가 말해주는 것〉」중에서
“너는 네 얘기를 왜 이렇게 안 해?" “일기장에 다 써서 그런가 봐.”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일기장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내 세계에서 밤의 시간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래서 진짜를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가 진심으로 물어봐 주었다면 꺼내볼 수 있었을까. 찬란한 낮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너의 밤이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어둡고 어두운 밤마다 네 옆에 있어 주겠다고. 이렇게 내 이야기를 물어봐 주는 사람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가 지금 누군가의 이야기를 물어봐 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
--- p.164, 「밤바의 상강 〈밤사의 마더 테레사〉」중에서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여러 성취의 합이 아닌 두려움을 줄여가는 과정이 아닐까.
--- p.188, 「예슬의 대설 〈불안을 안고 잠자리에 누우면〉」중에서
첫 만남에는 언제나 ‘내일 해일이 밀려와도 나는 오늘 하나의 작은 조개를 줍겠다'며 모 정치인이 했던 말을 뒤틀어서 나를 소개한다. 사회나 정치, 경제, 이념과 같이 거창해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한껏 휩쓸어 놓을 때도 작은 변화들과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속에 지닌 작은 가치들을 잊지 말자고 말하면서.
--- p.199, 「진리의 소한 〈천천히 일어서기〉」중에서
오롯이 혼자 살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의 결정을 지지하고, 삶의 면면을 공유하고 공감한다. 그래야 혼자가 될 수 있다.
--- p.213, 「새해 인사 - 예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