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좌리는 ‘신당의 마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800여 년 간 이어져온 상당(上堂), 중당(中堂), 하당(下堂)이 있으며 각종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상당은 바다로 나간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당이고, 중당은 김선근이라는 여인을 모시는 신당이다. 바로 선근교도 여기서 비롯 되었다. 하당은 마을입구에 솟대를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에 별신제를 지내는 등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3곳의 신당에 제를 지내는 기받이 별신제를 매년 정월에 지내고 있다. 이 토속신앙이 수백년 자리 잡은 곳에 전남 동부지역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교회 건립 역사이다. 또 무만(武萬)마을은 1680년경 광산 김(光山金)씨의 손(孫)이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이름도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사(武士)가 만명이 난다 하여 무만동(武萬洞)이라 했다고 한다.
---「본문 36쪽, 첫 교회 무만교회와 정태인 목사」중에서
조선시대 국교는 유교였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교의 예배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공자를 모시는 향교의 대성전이다. 순천도 마찬가지로 향교를 중심으로 양반사회가 단단히 묶어진 유교사회였다. 천주교가 한참 박해를 받던 시절에도 순천에는 천주교가 입성하지 못했다. 전남에서는 나주와 장성에서 천주교인이 처형되었을 뿐이었다.
---「본문 45쪽, 순천읍성은 여리고성」중에서
여수읍교회에서는 숭일학교 재학생 김순배(金順培, 1899~1970, 평양숭실·평양신학교 졸업, 여수읍교회4대 담임, 순천노회 수난사건으로 투옥, 건국훈장 애족장)와 정두범(鄭斗凡, 1899~1956, 조선일보·시대일보 기자, 한독당 광주시위원장, 건국훈장 애족장), 수피아여학교의 윤형숙(尹亨淑, 1900~1950, 여수읍교회 전도사, 건국훈장 건국포장) 등 3명이 참가했고, 광양에서는 다압면 출신의 수피아여학교 교사 진신애(陳信愛, 1900~1930, 건국훈장 애족장)가 참가했다. 진신애는 독실한 교인의 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양 다압면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교회가 진상면 섬거리교회(현 광동중앙교회)였다. 고흥읍교회 출신으로 숭일학교 교사 신의구(申義求, 1892~1974, 건국훈장 애족장)와 박무응 장로의 딸로 수피아여학교 재학생 박성순(朴聖淳, 1901~1981, 서울 약수동성결교회 권사, 건국훈장 대통령표창), 숭일학교 재학생 박오기(朴伍基, 1902~1945, 건국훈장 대통령표창)가 참가했다.
---「본문 67~68쪽, 전남 동부의 기독교와 3·1운동」중에서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남노회의 목포중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배경부터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후임 목사가 부임하기도 전에 서둘러 순천노회의 중심인 순천읍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이유도 바로 이런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순천노회와 전남노회 뿐만 아니라, 수도권 등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이상한 신사참배 찬성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 의혹을 뒷받침할 단서는 ‘순천노회 수난 사건’ 판결문에 그대로 나와 있다. 판결문을 보면 그는 “유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일본의 천조대신, 중국의 상제, 조선의 하느님은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신이므로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김승태, “1940년대 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의 대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제10호) 15~16쪽 는 ‘이명동일신론설(異名同一神論說)’을 설파해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또한 일본 천황이 여호와의 명에 의해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단이었다.
---「본문 97쪽, 신사참배 찬성한 박용희 목사의 실체」중에서
여수 우학리교회 이기풍 목사는 75세의 고령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해 여수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석방된 후 집에서 절명했고, 보성읍교회 황보익 목사는 신사참배는 차마 할 수 없다면서 목사직을 내려놓고 일본으로 유학을 핑계로 도피했다.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한 사건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신격화하여 그 후손 일왕을 ‘신’(神)으로 숭배하게 강요한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주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최고의 배교행위이었다.
---「본문 108쪽, 순천노회는 왜 신사참배에 굴복했는가」중에서
일제 말에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넓은 길을 간 자는 시류에 순응하면서 무사유(無思惟)로 대세를 따랐다. 그 결과 교회는 우상숭배의 무리가 되고 예배당은 악행의 소굴이 되었다. 겨레와 함께 웃고 겨레와 함께 욕을 본 수난자들은 좁은 길을 갔다. 일제가 태극기를 말살할 때 예배당의 십자가도 떼었으나, 자유와 양심과 순교의 정신은 없앨 수 없었다.
---「본문 120쪽,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실체」중에서
이경필 목사는 금정교회를 사임하고 육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다 목포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피할 수 없었다. 1953년 9월 자택 화장실에서 마당으로 나오다가 넘어져 낙상을 입었고, 다시는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김창국 목사도 양림교회 사임 후 광주 동명교회 당회장으로 있다가 은퇴했다. 그에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랐다. 6·25 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8월 11일 밤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본문 146쪽, 하나님의 징계와 장로교의 분열」중에서
이렇게 여순사건에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적인 이유로 봉기군이나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례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모두 정치적인 이유나 개인 간의 감정에 의한 희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곡된 점이 많다. 당시 학살 관련 정보도 대부분 국방부가 발표한 일방적인 정보일 뿐, 최근에는 연구자들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지지세력인 조선그리스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나, 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남한에서는 여순사건 당시까지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남로당도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김일성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여순사건은 1948년 9월 9일 수립한 북한 정부의 지령을 받거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반란도 아니었기에 기독교에 대한 반혁명적인 이유의 학살은 있을 수 없었다.
---「본문 172~173쪽, 여순사건과 개신교의 관계」중에서
황두연 장로는 출석한 순천중앙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승주교회는 나덕환 목사의 개입으로 김양수를 지지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경력이나 지역 인맥 등 모든 면에서 김양수가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당시 반한민당 정서가 작용해 황두연이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구인 순천갑구는 순천읍과 서면, 해룡면, 상사면 이었고, 그만큼 치열하게 선거가 치러졌다. 황두연이 독촉농민회 소속으로 서면 등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다. 순천 토박이도 아닌 여수 출신의 황두연 장로에게 패한 김양수와 그를 지지한 선거운동원으로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황두연 후보를 지지한 운동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여순사건에서 엉뚱하게 좌익으로 몰아가는데 작용갔던 것이다. 그들이 대거 제거된 후 치러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황두연과 재대결을 펼쳐 김양수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본문 183쪽, 제헌선거 후유증과 손가락총」중에서
최소한 여순사건에서는 보수우익의 주장처럼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보고 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로 알려진 이는 당시 13살이었던 윤순웅(1935~2022, 전남대의대 졸업, 소아과 의사, 순천시보건소장(1976년까지) 역임, 서울용두동감리교회 장로) 장로뿐이다. 그의 증언이 손동희 권사의 증언이 되었고, 안용준 목사의 기록이 되었다. 그도 2014년 기독교역사학자 이만열 장로 등 복수의 기독교사 연구가를 만난 자리에서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탁 찬반 문제 등 다른 의견 차이로 격렬한 다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또한 안재선의 형 안재용이 순천중학교를 다니다가 사범학교로 옮겼고 좌익활동에도 가담했으며, 손동인을 사망케 했다는 증언도 있다. 안재선도 “어떻게 죽였느냐”는 마지막 신문에 “네. 사격을 했는데, 다섯이 쏘았기 때문에 내 총에 맞았는지 안맞았는지 몰라도 쓰러진 동신에게 다시 두 번을 더 쏘아 보았습니다”라고 자신의 범행을 고백했다. 이렇게 안재선의 직접 살해 여부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본문 210쪽, 손동인·동신 형제의 순교와 진실」중에서
앞서 1982년 6월 14일에는 매곡동 순천노회 회관 화단에 순교비를 세웠다. 이 순교자 명단이 심사 시점 기준이기는 하지만, 합동교단 여수제일교회와 우학리교회 소속 순교자들이 빠진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순교 당시 시점으로 보자면 당연히 같은 순천노회 소속으로서 포함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한국교회가, 통합교단이 이렇게 속 좁은(?) 모습을 보이면서 어떻게 세상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예수를 믿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시 경남노회(고신파) 소속이었던 손양원 목사도 제외되어야 하지 않는가. ‘남도의 유관순 열사’로 불리는 여수제일교회 윤형숙 전도사와 우학리교회 황도백 집사, 곽은진 집사, 안경수 성도는 왜 여수 미평동 순교자기념비에는 제외하지 않고 이름을 새겼는지 알 수가 없다. 구례읍교회 이선용 목사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구례 월전교회 정관백 전도사와 구례읍교회 이판열 집사 부부는 왜 순교자 명단에서 빠졌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순교자 선정기준마저도 이렇게 목회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면 안된다.
---「본문 258쪽, 완전한 순교자가 되는 길」중에서
이기풍 목사는 원칙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먼저 살피고 약자를 배려했던 따뜻한 지도자였다. 특히 교회 행정가로서 남긴 꼼꼼한 기록들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의 삶을 쫓다 보면 그런 진면목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다.
---「본문 288쪽, 전라도를 사랑한 조선의 바울 사도 이기풍」중에서
차남 황보익 목사의 아들 황성수 박사는 60세에 목사안수를 받아 LA충현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황성수 목사의 세 아들도 모두 목사가 되었다. 큰아들 희철은 미국 캘리포니아 교육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찍 퇴직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명지대 교목실장을 거쳐 은퇴 후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 규명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미국 목회를 거쳐 총신대 교목실장으로 섬기고 있고, 셋째 규영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본문 320쪽, 신사참배 반대로 순종한 황보익 목사」중에서
당시 돌산 둔전리에 정착했던 감리교인들은 황해도 연백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교단의 지원을 받아 여수시내, 순천, 고흥 동강 등 3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여수는 유호영 장로 등이 서정시장통으로 옮겨 1952년 동산감리교회를 세웠다. 사람들은 ‘피난민교회’라고 불렀고, 낯선 타향에서 행상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에 바쳤다. 현재는 덕충동으로 옮겨 자리하고 있다. 이때 1951년 순천으로 이주한 원태익 장로가 개척한 교회가 순천중앙감리교회로 현재 중앙동 남문성터 뒤편 ‘동재’ 카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천막교회로 시작하다가 세운 교회로 종탑 등 건물형태가 그대로 재활용되고 있다. 현재는 조례동 선혜학교 앞으로 이전해 있다. 고흥 동강은 우천영 장로가 이주해 동강감리교회를 세웠다.
---「본문 330쪽, 영광의 감리교 순교자와 전라도〉중에서)
그렇다면 이들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싫어한 배경은 무엇일까. 해방 이후 소련이 들어와 군정을 실시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자 단체와 일본군 총기를 소지한 적위대가 충돌했다. 오산학생사건, 용암포사건이 이어졌다. 하여튼 이북에서 개신교세력이 적위대 등 김일성 친위조직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피해를 입어 대거 남하했다. 그런 과정에서 가족의 해산, 재산 피해 등도 많았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서북세력을 사실상 ‘토사구팽(兎死狗烹)’시켰다. 이승만은 서북청년회를 해산시키고 대동청년단을 발족시켰다. 서북청년회 뒤에는 김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생하면서 서북청년회는 다시 부활했다.
---「본문 347쪽, 기독교는 왜 공산세력과 적이 되었나」중에서